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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잠입 없이 제2의 '박사방' '손정우' 검거 못 해"

"위장·잠입 없이 제2의 '박사방' '손정우' 검거 못 해"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웹사이트 '웰컴투비디오' 운영자 손정우가 9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심문)를 마친 뒤 호송차로 이동하고 있다. 2020.11.9/뉴스1 © News1 박지혜 기자


"위장·잠입 없이 제2의 '박사방' '손정우' 검거 못 해"
© News1 김일환 디자이너

(서울=뉴스1) 이승환 기자 = "신분증을 찍어 보내주세요"

미성년자 등을 협박해 제작한 성 착취물을 판매하던 텔레그램 A방. 성착취 동영상 거래 과정에서 A방 운영자는 회원들에게 신분증을 요구했다. 검거 목적의 경찰인지, 취재 목적의 기자인지, 구매 목적의 실제 회원인지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수사관들은 여기서 '딜레마(진퇴양난)'에 빠졌다. 신분을 가장해 수사할 수 있다는 규정이 현행법에 없어 그 요구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수사관들은 끈질긴 추적으로 A방 운영자를 비교적 조기에 검거했으나 경찰 내부에서는 "위장 잠입 수사가 가능했다면 더욱 수월하게 잡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10일 <뉴스1> 취재를 종합하면 이른바 '함정수사'로 불리는 위장·잠입 수사를 제도적으로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비등해지고 있다.

상당 수 경찰관은 "위장·잠입 수사 없이 제2의 'n번방', '박사방', '손정우'를 검거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시민단체도 "위장·잠입수사 허용 방안을 입법화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디지털 성범죄가 그만큼 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함정수사 적법성 여부는 법조계의 뜨거운 감자다. 특히 기회제공형 함정수사는 인정해야 한다는 흐름이 가파르게 확산하고 있다. 기회제공형 함정수사란 일선 수사관들이 범행 의사가 있는 사람에게 접근해 그가 범죄를 실행하는 순간 검거하는 방식이다.

대법원도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사건 추적 과정에서 수사관들이 '기회제공형 함정수사'를 벌인 것을 놓고 지난 4월 '적법하다'고 판시한 바 있다.

그러나 A방 운영자처럼 신분증을 요구하면 수사관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세밀함이 요구되는 수사 현장에서는 법적 근거 없이 함정수사를 감행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형사사법 절차상 증거를 채집하거나 임의 제출하게 하려면 통상적으로 경찰관 신분을 밝히고 영장을 제시해야 한다.

경찰 고위 관계자는 "올해 디지털 성범죄 피의자 가운데 상당 수가 '위장·잠입 수사'를 통해 검거됐지만 경찰이 신분을 가장해 증거를 채집했다면 (재판 과정에서) 증거 능력을 인정 받지 못할 수 있다"며 위장·잠입 수사를 허용하는 방안의 '입법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회에서는 아동 청소년을 겨냥한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 '신분 비공개'를 유지한 채 수사할 수 있다는 법안이 이미 제출된 상태다.

양금희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5일 대표 발의한 해당 법안(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에는 "범인의 체포 또는 증거의 수집이 어려운 경우 수사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신분을 비공개하고 정보통신망을 포함한 범죄현장이나 범인으로 추정되는 자에게 접근해 증거·자료를 획득할 수 있다"고 적시됐다.

시민단체 리셋은 "현재 디지털 성착취 단체방의 범죄자들은 (경찰인지 아닌지)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며 공범이 될 것을 요구하거나 조주빈이 했던 방식과 유사하게 신상 정보를 밝히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며 "범죄자가 범죄 실행에 다다른 경우 경찰이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지 못하게 돼 검거하지 못한다면 이는 범뵈자들에게 범죄 수법의 보완과 또 다른 범죄 기회를 찾아 나설 빌미로 작용할 것"이라고 조속한 입법화를 촉구했다.


전문가들도 위장·잠입 수사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위장·잠입 수사 없이 'n번방', '손정우의 다크웹', '박사방' 등 디지털 성범죄 현장을 추적하고 증거를 확보하기 어려운 현실"이라며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과 확산 속도를 고려해 위장·잠입 수사가 제도적으로 보장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다만 범죄 의사 없는 사람에까지 접근해 범행을 유도하는 '범의유발형 함정수사"에 대해선 "허용돼선 안 되고 오히려 처벌해야 할 수사 방식"이라며 수사관들이 명확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