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

"조주빈이 끝 아냐…디지털성범죄 근절, 내 생애보다 긴 싸움"

"조주빈이 끝 아냐…디지털성범죄 근절, 내 생애보다 긴 싸움"
리셋의 최서희 대표, 홍수정 피해자지원팀장, 양예나 대외협력팀장이 지난 3일 인터뷰를 마친 뒤 손을 모았다. © News1 김일환 디자이너


"조주빈이 끝 아냐…디지털성범죄 근절, 내 생애보다 긴 싸움"
지난 11월13일 리셋과 'eNd팀'이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의 담당 재판부에 제출한 엄벌 탄원서(리셋 트위터 갈무리)/뉴스1

(서울=뉴스1) 한유주 기자 = 2019년 12월5일. 트위터에 게시물 하나가 올라왔다. 텔레그램 채팅방에서 발생하는 성착취 범죄를 신고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심각성을 느낀 평범한 여성들이 나섰다.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일상을 털어 텔레그램 채널을 돌며 성착취·불법촬영 영상이 공유되는 증거를 남기고 유포자를 신고했다.

열심히 했지만 끝이 없었다. 하나를 신고하면 또 다른 채팅방에서 새로운 가해영상이 올라왔다. 조직화의 필요성을 느낀 여성들은 열흘 뒤인 16일 트위터 계정을 열었다. 계정명은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 ReSET(리셋)'으로 정했다. 디지털 공간에서 잃어버린 여성의 안전을 다시(Re) 세우자(SET)는 의미였다.

1년이 지났다. '잠깐 힘을 보태면 되겠지, 금방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라며 시작했지만 갈수록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텔레그램뿐 아니라 디스코드, 트위터 등 디지털 성범죄의 판이 커진 만큼 모니터링 범위도 커졌다. '프로젝트'란 명칭을 버리고 정책·제도 개선 운동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경찰과 수사 공조를 하고, 정부 부처를 상대로 디지털 성범죄 현황을 브리핑한다.

리셋의 지난 1년을 되돌아보고자 리셋의 최서희 대표와 홍수정 피해자지원팀장, 양예나 대외협력팀장을 만났다.

◇ 활동가들 역시 '외상' 피해자…"성범죄 모니터링은 국가가 할 일"

리셋의 가장 대표적인 업무는 디지털 성범죄 모니터링과 신고다. 성착취물, '지인능욕' 등 가해 상황을 찾아 증거를 수집하고, 이를 수사기관이나 플랫폼 등에 신고한다.

알고 시작했지만 채증 업무는 쉽지 않았다. 성착취물 채증과 피해자지원 업무를 맡은 수정씨는 활동 3개월쯤 무력감이 밀려왔다고 말했다. 4~5살밖에 안 되는 어린 여자아이들을 가해하는 상황을 발견했을 땐 분노가 치밀었다. 지인의 개인정보를 올리고 모욕하는 대화방을 볼 때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란 생각에 충격받았다. 밤에는 모니터링 업무를 할 수 없었다. 꿈에서도 피해영상의 잔상이 나와 계속 괴롭혔다.

수정씨만의 일이 아니다. 모니터링을 진행하는 활동가 대부분이 타인이 겪은 피해 상황을 '내 일'처럼 감정이입하며 괴로워했다. 특히 피해 경험자들이 크게 버거워했다.

경험이 누적되며 리셋은 모니터링 업무 조건을 만들었다. 미성년자와 피해 경험자를 지키기 위해 모니터링 업무에 참여할 수 없게 했다. 모니터링에 참여하는 활동가는 심리상담을 꼭 받아야 한다.

동시에 리셋의 목소리는 공권력을 향했다. 디지털 성범죄 모니터링은 사실 '국가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에서다. 리셋은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여성 경찰이 모니터링과 채증을 해 가해자를 특정하고, 바로 피해자에게 안내해 2차 피해를 막길 원한다. 서희씨는 "저희는 전문화되지 않은 일반여성이기 때문에 사실 저희한테도 안 좋고 피해자에게도 최선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 탄원서제출·입법청원까지 발 넓힌 리셋…디지털성범죄 여전히 진행중

디지털성범죄 가해자들의 재판이 시작되면서 리셋은 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 'eNd팀'과 함께 시민 탄원서를 모아 제출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13일에는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인 조주빈의 엄벌 탄원서를 담당 재판부에 제출했다. 무려 8만장이 모여 33상자에 나눠 담고, 용달차까지 불렀다.

그래서 리셋은 조주빈의 40년 선고에 분노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26일 법원은 조주빈에게 검찰의 무기징역 구형보다 낮은 징역 40년을 선고했다. 서희씨는 "다른 디지털 성범죄자들이 조주빈도 40년 나왔는데 그보다 더 착한 나한테는 왜 무기징역 구형하느냐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조주빈이 받은 형량이 기준이 돼 다른 가해자들 선고에 영향을 미치지 않겠냐는 우려도 나온다. 여전히 일부 재판부는 미성년자이거나 반성의 기미가 보인다는 이유로 감형해주는 가해자 중심적 판결을 하고 있다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느낀 리셋은 입법부와 사법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올해 초에는 국회 국민동의청원에 디지털 성범죄의 엄격한 양형기준 설정 등을 요구하는 청원을 올려 10만명의 동의를 얻었다. 그 결과가 국민청원 1호 법안이라고 알려진 '텔레그램 n번방 방지법'이다. 그러나 'n번방 방지법'이란 말이 무색하게 처벌은 '딥페이크' 범죄로 한정됐다.

리셋은 "문제해결을 위해 당연히 필요하다 생각했던 것이 아직 법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후순위 문제라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예나씨는 "가해 행위를 인지하고, 범죄 유형을 분류하고, 사회적 합의를 해서 정책과 법률까지 만드는 것은 수년이 걸리는 과정"이라며 "계속해서 세밀해지고 정교해지는 디지털 성범죄의 특성상 그때그때 사후적으로 법을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앞서간 법을 만드는 게 좋지 않나"라고 덧붙였다.

다만 리셋은 "모든 사회는 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피해자가 더 나오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성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디지털 성범죄 근절 목표는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서희씨는 "소라넷 폐지 운동을 했던 DSO의 활동이 벌써 5년 전이고, 그 전에 빨간마후라같은 불법 촬영물까지 디지털성범죄 역사는 제 생애보다 길다"며 "내 생애보다 긴 싸움에 뛰어든 건데 오래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수정씨는 "디지털 성범죄 행위가 많이 줄어든 것처럼 보이지만 많이 사리고 있어서지 사실 엄청 꾸준하게 사진과 영상이 올라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디지털성범죄에 관심을 계속 가져달라는 당부도 했다. 서희씨는 "조주빈이 40년을 선고받았으니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상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며 "어린 학생들이 코딩을 배우며 기술은 발전하는데 그에 맞는 성인지 감수성 교육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리셋은 "디지털공간에서, 내가 매일 쓰고 있는 스마트폰 때문에 인류의 절반은 고통받을 수 있고 실제로 그런 분들이 있다는 것을 인지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