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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어도 멈추지 못한 강제노동의 비극…서산개척단

사람이 죽어도 멈추지 못한 강제노동의 비극…서산개척단
서산개척단원이 아직 모여 살고 있는 서산시 인지면 모월3리. 2020.12.30. © 뉴스1 서혜림 기자.


사람이 죽어도 멈추지 못한 강제노동의 비극…서산개척단
서산시 인지면 모월3리의 풍경. 겨울 들판이 널찍하게 펼쳐져 있다. 2020.12.30.© 뉴스1 서혜림 기자


사람이 죽어도 멈추지 못한 강제노동의 비극…서산개척단
서산개척단원들이 산에서 돌을 이고 와서 만든 저수지. 2020.12.30. © 뉴스1 서혜림 기자


사람이 죽어도 멈추지 못한 강제노동의 비극…서산개척단
정영철 서산개척단진상규명대책위원회장 2020.12.30. © 뉴스1 서혜림 기자.


사람이 죽어도 멈추지 못한 강제노동의 비극…서산개척단
정영철 회장(왼쪽)이 개척단 희생자 무덤 앞에서 감회에 젖어있다. 2020.12.30. © 뉴스1 서혜림 기자 © 뉴스1


사람이 죽어도 멈추지 못한 강제노동의 비극…서산개척단
정영철 회장은 서산개척단의 진상이 하루 속히 밝혀지길 바란다고 했다. 2020.12.30. © 뉴스1 서혜림 기자


사람이 죽어도 멈추지 못한 강제노동의 비극…서산개척단
1960년대 서산청소년개척단 작업광경. © 뉴스1 (국가기록원 제공)


사람이 죽어도 멈추지 못한 강제노동의 비극…서산개척단
서산시 인지면 모월3리에 옛 서산개척단 막사가 남아 있다. 2020.12.30. © 뉴스1 서혜림 기자


사람이 죽어도 멈추지 못한 강제노동의 비극…서산개척단
서산개척단 피해자와 2세들이 들판에 서있다. 왼쪽부터 피해자 2세인 유병엽씨, 정영철 회장, 피해자인 이정남씨. 2020.12.30. © 뉴스1 서혜림 기자


[편집자주]국회 앞에서 농성하던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지난해 927일 만에 천막을 걷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기 때문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는 2020년 12월 10년 만에 활동을 재개했다. <뉴스1>이 과거사 피해 현장을 찾아가 목소리를 듣고 정근식 진화위 2기 위원장과 만나 해법을 모색한다.

(서산=뉴스1) 서혜림 기자 = "지금도 난 음식을 못 버려. 배가 너무 고팠던 그때가 생각 나서…"

오밤중에 찾아온 경찰이 워커발로 걷어차며 트럭에 태웠다.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하면서도 이들은 군용 트럭에 떠밀려 올랐다가 낯선 곳에 내렸다. 그렇게 끌려간 곳이 충남 서산의 폐염전. 이들은 그곳에서 무보수로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강제로 결혼까지 하며 처참하고 힘든 시간을 살아냈다. 1961년도부터 1966년까지 일어난 '서산개척단' 사건이다.

서산개척단은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이뤄진 부랑아 정책의 하나다. 청소년과 성인 1700여명이 바닷물 들어오는 골짜기에 강제수용돼 개척 사업에 동원됐다. 이들이 이렇게 내몰린 것은 단지 부랑아, 고아, 전과자였기 때문이다. 119명이 비명횡사한 것은 이들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은 그 누구도 임금을 받지 못했고 나눠준다던 땅 한 평도 받지 못했다.

서산개척단은 2010년에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개척단에 끌려간 형이 총살을 당했다며 한 유족이 당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제1기에 진실규명을 신청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 사건은 진실규명 불능으로 처리됐고 서산개척단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다.

지난해 12월 10년 만에 진실화해위원회 2기가 세워지자 피해자들이 용기를 냈다. 이들은 어떤 기억을 안고 있을까. <뉴스1>은 주민 10여명이 아직 함께 살고 있는 충남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 118번지를 찾아갔다.

◇허리까지 빠지는 죽은 땅 120만평 손으로 개척…산 깎아 저수지로

모월3구는 서산 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30여분은 가야 나오는 작은 마을이다. 수십만평의 논두렁 뒤편에 모월리 118번지를 중심으로 허름한 주택 20여채가 있었다.

겉으로는 흔히 보는 시골 마을이지만 유심히 살피면 아니다. 길을 안내해주는 할머니도, 농경지로 가는 할아버지도 "서산개척단을 아시느냐"는 질문에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주민들은 모두 개척단 단원이거나 그들의 후손이다. 개척단의 역사를 잘 기억한다.

주택 뒤의 수만 평 평지는 곡괭이 질로 일궜다. 주민들은 "허리까지 빠지는 펄을 흙으로 메웠어"라고 입을 모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절반 정도 깎인 산이 보였다. 저 산의 검은 돌로 저수지를 만들었다. 차를 얻어타고 저수지에 가니 물 밑으로 검은 돌이 보였다.

개척단은 오전 6시에 일어나 해가 떨어지기 직전까지 일했으니 노동시간이 12시간쯤 된다. 하루에 두번은 이유 없이 두들겨 맞았다.

◇119명 죽음…곡괭이질 하다가 죽어도 누구 하나 말 못해

모월3구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세상에 없던 무법지대'였다. 이들을 삶을 좌우한 이는 국가가 단장으로 임명한 민정식이라는 사람이었다. 한 사람이 수많은 사람의 삶을 주무른 것을 어찌 볼 것인가.

민정식은 개펄의 끄트머리에 서서 개척단원들을 감시했다. 그의 지시를 받는 경비대는 몽둥이를 든 채 개척단원들이 간격을 유지하며 제대로 땅을 메우는지 지켜봤다.

일하던 동료가 숨지면 단원들이 야산에 몰래 묻었다. 그렇지 않으면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며 간부들로부터 죽도로 맞았다.

"주민들은 알았지. 거적때기 하나 덮어 가져가면 개척단에서 또 한 명 죽었구나 생각했지."

개척단 주민들의 안내로 무등산 꼭대기로 가보니 유난히 큰 봉분이 다섯개 있었다. 한 봉분 밑에는 해골이 된 소년소녀 119명이 이름도 없이 뒤엉켜 합동으로 묻혀 있다. 세상에 없던 마을에서 무보수 노역을 하다 죽어도, 그 죽음조차 세상에 없던 일처럼 잊힌 것이다.

잡혀온 이들은 사랑도 마음껏 할 수 없었다.

정부는 1963~1964년 개척단원들을 강제 결혼시켰다. 부랑아들이 가정을 이뤄 살게 한다는 이른바 사회정화사업의 일환으로서 말이다. 정부는 이들의 결혼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러나 실상 결혼은 단원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너희는 신랑 신부가 된다"며 강제로 짝을 맞춘 것이라 한다. 그러니 가정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정영철 서산개척단진상규명대책위원회 회장(79)은 1962년에 강제 결혼한 미화씨(가명)를 아직도 기억한다.

"매일 잠도 안 자고 울었지. 하도 불쌍해서 내가 도망을 보내버렸어. 밤에는 무조건 달리고 낮에는 어느 집이건 들어가서 살려달라 빌라고 했어."
◇불모지 개간했더니 땅 국유지로 가로채…"노동 대가는 지불해줘야"

이들이 곡괭이와 삽으로 일군 땅은 국유지로 바뀌었다. 당시 정부는 서해 개펄을 개척하고 세대당 3000평을 무상분배해준다고 했지만 아무도 받지 못했다.

약속대로 땅을 달라며 숱하게 소송을 했지만 누구도 이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들은 지금도 자신들이 일군 땅과 개척단원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 세를 내며 농사를 짓고 있다.

"우리는 수십억원하는 명동보다 이 땅이 더 소중해. 내 피와 땀이고 살이고 삶이야."

이들은 소작일을 하거나 막노동을 하면서 여전히 극빈층으로 살고 있다.

이제 시대가 변했고 사람도 변했다. 이들도 어두웠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나마 꺼낼 수 있게됐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가 개척단 청년의 죽음을 조사한 이후 다큐멘터리와 뉴스에서 자신들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의 잘못이 아니다'는 믿음이 강해졌다고 한다.

이들은 동네 주민과 전국에 흩어진 옛 개척단원 그리고 2세들의 연락을 받아 "국가에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자"는 말도 꺼냈다. 정 회장은 "내 청춘을 뺏어간 것이 국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야. 그게 10년 전이야"라고 말했다.

개척단원으로 끌려오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 것 같냐고 물었더니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배운 건 없어도 열심히 살았을 테고 작은 가게라도 내지 않았을까"라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들은 몇십년째 모월3구에서 땅을 임대하거나 아니면 빚을 내 땅을 사서 농사를 짓고 막노동을 하고 있다. 교육 받을 기회도 놓치고 도시로 떠날 기회도 놓쳤다.

"그때는 고아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 팔자인지 알았지…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어. 그런데 지금은 아냐."

연락이 닿은 단원 66명은 진실화해위원회 2기에 최근 진상규명을 신청했다. 이들이 고령의 나이에 바라는 것은 단 한가지, 짓밟힌 인권을 보상받는 것이다.
땅 문제는 둘째치고 무보수로 노동한 세월을 국가가 보상해달라는 것이다.

정 회장은 "피해자들은 다들 70~80대의 고령이며 얼마 전에도 1명이 사망했다"며 "야당이 진실화해위원회 제2기 위원을 추천해주어야 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해 개척단의 진상이 드러날 텐데 그러지 않아 아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 세월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우리의 소원을 꼭 좀 들어달라"고 거듭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