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프 대변인 사퇴는 옳은 길
상선약수 좌우명에 어울려
피해자 만나서 꼭 안아주길
곽인찬 fn 논설실장
고민정 의원님, 잘 하셨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줄로 압니다. 선거가 코앞인데 캠프의 얼굴 격인 대변인이 불쑥 물러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박영선 서울시장 후보에게 사전 양해도 구하지 않았다구요? 나중에 박 후보가 "아프다"고 했는데 이해할 만합니다.
저는 고 의원님의 결정을 지지합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를 보았거든요. 그것도 초선이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먼저 사퇴하셨어요. 다른 두 분은 고 의원님을 따라하셨구요.
한국 정치의 병폐 중 하나가 편 가르기입니다. 우리 편은 뭘 해도 감싸고, 상대 편은 뭘 해도 때립니다. 옳고 그름은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구요. 독일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1888~1985)는 정치의 본질을 적과 동지의 구별에서 찾았다죠. 그가 2021년 한국 정치를 봤다면, "봐, 내가 뭐라 그랬어?"라며 득의양양했을 겁니다. 다행히 고 의원님이 예외를 보여주셨어요. 한국 정치가 모조리 진영 논리의 노예는 아니라는 희망을 말이죠.
고 의원님은 세상이 다 아는 친문입니다. 그래서 더 곤혹스러운 점이 있었을 겁니다. 의원님은 페이스북을 통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피해자에게 머리를 숙였습니다. 거기에 비판 댓글이 달렸습니다. "당신은 박원순 시장을 버렸다"는 내용도 있다죠? 부디 기죽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추행 피해자에 대한 사과는 진영 논리로 재단할 일이 아닙니다. 고 의원님의 결정은 먼저 가신 박 전 시장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20년 집권을 꿈꾸는 더불어민주당은 진보를 표방합니다. 진보가 무엇입니까? 우리 사회의 약자를 먼저 돌보는 게 진보 아닌가요? 한국과 같은 남성 우월주의 사회에선 여성이 약자입니다. 장애인, 청년, 노인, 성소수자들이 약자입니다. 그러나 제 눈에 민주당은 무늬만 진보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여성과 성소수자 문제에선 보수 국민의힘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요. 민주당이 내건 진보의 가치는 표 앞에선 맥을 못 춥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희롱 피해자가 지난 17일 서울 중구 명동의 한 호텔에서 긴급 기자회견 열고 더불어민주당에 진정성 있는 사과를 요구했다. 이튿날 박영선 서울시장 후보 캠프의 고민정 의원이 대변인직에서 물러났다. 고 의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어떻게 해야 피해자의 아픔을 치유해 드릴 수 있을까 지난 몇개월 동안 끊임없이 고민해 왔다"고 말했다. /사진=뉴시스
피해자는 지난주 기자회견에서 "지금까지 민주당의 사과는 진정성도 현실성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위안부 할머니들이 떠올랐습니다. 지금까지 일본이 우리한테 여러차례 사과했습니다. 일왕도 했고, 총리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할머니들은 일본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아서입니다. 마지못해 하는 사과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거든요.
진짜 미안하다면 적어도 일본 총리가 서울에 와서 할머니들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문 정부는 이걸 피해자 중심주의라고 부릅니다. 저는 민주당이 가슴에 손을 얹고 박 전 시장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죄했는지 스스로 물어보길 권합니다.
고 의원님께 당부합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피해자를 직접 만나서 꼭 안아주세요. 그래야 덧나고 또 덧난 피해자의 상처가 아뭅니다. 이걸 두고 옹졸한 이들이 듣기 거북한 소리를 하더라도 신경 쓰지 마세요. 2019년 4월이던가요, 청와대 대변인으로 첫 브리핑하던 날,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말씀하신 걸로 기억합니다. 물처럼 흐르는 게 가장 좋다는 말이죠. 저는 이걸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고 의원님의 선택은 상선약수와 어울립니다.
민주당에도 당부합니다. 친문 표에만 목을 매지 마시고 더 큰 그림을 그려주세요. 김태년 당대표 직무대행이 고 의원과 함께 피해자를 찾아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민주당을 달리 보겠습니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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