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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가습기살균제 등 유해물질소송,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사법부

건보공단, 국제세미나로 담배소송 1심판결 문제점 논의

[파이낸셜뉴스] "피해자들에게 증명책임 돌려 인과관계 증명 불가능하게 만들어", "가해자가 총으로 피해자 죽였는데 총알 이외 다른 원인으로 죽지 않았다는 점 증명하라는 것", "중독설계에 무지했던 소비자들의 피해에 법적 책임 묻는 것 봉쇄"
국민건강보험공단은 1일 담배소송 1심 판결에 대한 국내외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향후 소송 대응 방향 등을 논의하기 위해 대한금연학회, 한국금연운동협의회와 공동으로'담배소송 국제세미나'를 개최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11월20일 서울중앙지방법원(제22민사부)은 흡연과 폐암 발병 간의 인과관계조차 인정하지 않는 내용으로 국민건강보험공단 패소 판결을 선고했고, 이에 건보공단은 즉각 항소를 제기했으며 외부 소송대리인으로 법무법인 대륙아주를 선임한 바 있다. 항소심에서 새로 선임된 대륙아주는 재판기록 검토를 거쳐 2일 1심 판결의 오류 및 추가심리가 필요한 부분을 중심으로 서울고등법원에 항소이유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이번 국제세미나에서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정상현 교수는 1심 판결 내용에 대한 종합적 분석을 통해 "선행 대법원 판결 사안과는 당사자가 다르고, 주장과 증거들이 상이함에도 재판부가 기존 대법원 판결을 거의 기계적으로 복기하고 특이성·비특이성 질환을 임의로 구분해 피해자들에게 엄격한 증명책임을 지워 결국 유해물질로 발병되는 질환에 관한 인과관계 증명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면서 "담배회사들에게 책임을 묻는 소송에서 정작 담배 제품의 위험성과 피고들이 제조·수입·판매할 당시에 알고 있었던 위험성에 대해 전혀 판단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담배에 대한 사회통념이 변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한 법원에 대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발을 딛지 않고 다른 차원에 속해 있는 것인지 되묻는다"고 덧붙였다.

'역학의 철학' 저자인 요하네스버그대학교 알렉스 브로드벤트 교수는 1심 법원이 흡연과의 인과관계를 부정하면서 제시한 이유들이 모두 합당하지 않다고 반박한다. 그는 "흡연으로 인해 이 사건 폐암(편평세포암, 소세포암)이 발병했다는 사실 자체는 합리적 추론에 해당한다"면서,"흡연 이외에 다른 원인으로 위 암종이 발병하였다는 점을 증명하라는 것은, 어떤 가해자가 총을 쏴서 피해자가 죽은 상황에서 그 피해자가 총알 이외에 다른 원인으로 죽지 않았다는 점을 증명하라는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이어 "건보공단 담배소송에서 흡연 이외에 다른 원인으로 이 사건 폐암이 발병하였다는 점에 대한 증명을 담배회사들이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대 이두갑 교수는 미국 담배소송 판결과 비교하면서 "미국은 1980년대 이후 담배의 중독성에 대한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고, 중독에 대한 신경과학적 이해가 진전됨에 따라 담배회사들이 소송에서 패소하기 시작했고, 소송 과정에서 담배가 담배회사의 이윤을 위해 '중독설계'되는 제약상품과 같은 것이며, 이러한 중독에 대한 과학적 사실과 증거들이 담배회사에 의해서 조직적으로 은폐되고 왜곡됐따는 사실이 확인됐따"면서 "건보공단 담배소송에서는 미국 법정에서 명확히 밝혀진 사실, 즉 담배회사들의 고도화된 증거생산과 중독설계, 이에 대한 은폐 사실들을 모두 외면하고 있다. 이러한 국내 법원의 태도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담배회사들과 달리 중독 설계에 대하여 무지했던 소비자들의 피해에 대하여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당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캐나다 퀘벡주 담배소송을 승리로 이끄는데 주도적 역할을 해온 '담배 없는 캐나다를 위한 의사회'의 닐 콜리쇼우 연구소장은 먼저 캐나다와 한국의 담배소송은 너무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캐나다에서 최대 규모의 피해 배상이 인정된 퀘벡주의 집단소송은 항소심까지 승리했음에도, 현재 담배회사들의 파산보호신청으로 인하여 배상금이 지급되지 않은 상태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 중"이라면서 "캐나다에서의 호의적인 판결은 지난 수십 년 간 실패를 통해 거둔 성과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담배업계와의 소송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담배업계 변호사들의 전략에 저항할 수 있는 변호인단의 절차적 통찰력, 담배회사의 내부 문건들, 그리고 입법을 포함한 제도적 지원 등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이어서 진행된 종합토론에서, 흡연 피해자 개인소송과 공단 담배소송 1심을 진행했던 정미화 변호사는 "1심 진행 과정에서의 소회를 밝히며,'미국 RICO 사건에서의 판결문이 1,700페이지, 캐나다 집단소송 항소심 판결은 415페이지에 이르는데 우리 1심 판결은 별지를 제외하고 33페이지에 불과하다'라면서 담배소송을 바라보는 사법부의 시각이 변화돼야 한다"고 말한다. 담배규제정책의 중추 역할을 담당하는 복지부 건강증진과 이윤신 과장은 "담배소송은 흡연의 폐해를 분명하게 알리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서, "흡연은 개인의 의지 문제만이 아닌,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국민 전체의 건강문제로, 이러한 이유로 국가 차원의 해결을 위하여 많은 정책적 지원과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을 대리하여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환경보건시민센터 황정화 변호사는 "담배소송 뿐 아니라,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통해 드러난 판결 내용의 부당성을 언급하면서, 유해물질로 인한 피해 사례에 관한 사법부의 기준이 변경되어야 하고, 이를 위하여 보다 광범위한 연대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개진한다.

hsk@fnnews.com 홍석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