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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팬 톡] 국가 주도 반도체전쟁, 우린 안전할까

[재팬 톡] 국가 주도 반도체전쟁, 우린 안전할까
1985년이었다. 미국이 잘나가던 일본 반도체 산업의 팔을 꺾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다.

올해 1월 31일, 일본 외무성은 1986년 9월 반도체 강국 일본이 미·일 반도체협상에서 백기투항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기록한 외교문서 12개를 무더기로 공개했다. 미국의 공세에 대항해 꽤나 발버둥쳤던 일본 통상관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싸움의 패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세계 1등 일본 반도체 산업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미국은 미국산 반도체 제품 수입할당제를 부여하고, 시시때때로 슈퍼 301조를 들먹거리며 보복관세를 휘둘렀다. 1996년 미·일 반도체협정이 종결될 때까지 이런 상황은 반복됐다. '주먹의 힘'은 셌다.

35년 전 일본의 팔을 비틀었던 미국이 이번엔 일본의 손을 잡았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겨냥, '미·일 반도체 동맹'을 맺자는 것이다.

일본도 필사적이다. "먹느냐, 먹히느냐" 반도체 쟁탈전에서 패한다면 인공지능(AI), 자율주행차 등 미래 첨단산업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백악관과 일본 경제산업성은 이미 '쩐의 전쟁'을 예고했다. '해외기업의 생산공장을 유치하든, 인수를 하든' 닥치는 대로 자국으로 끌어모으고 있는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반도체 연구개발, 미국 내 생산 등에 500억달러(약 56조원)를 쏟아붓겠다고 공언했다. 일본 경제산업성도 5월 정책 수립을 목표로 지난 3월 기업 관계자들을 불러모아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방안을 논의했다.

지난 20년간 '평화롭게' 유지돼 온 국제 분업구조가 격렬하게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비단 반도체뿐만이 아니다. 매출 7조원대 일본의 글로벌 생활용품 기업인 아이리스 오야마의 오야마 겐타로 회장은 지난달 본지 인터뷰에서 "기본물자를 어느 한 나라에 내맡기는 것은 리스크가 있는 법,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것'과 글로벌 공급망이라는 '경제성' 사이에 양면전략(二面, 복합전략)이 요구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에게는 '뼈아픈' 일본의 불화수소 수출규제도 그런 예가 아니겠느냐고 지적했다.

일본의 반도체 대기업 르네사스 테크놀로지는 지난 2월까지 최근 3년간 반도체 관련기업 인수에 약 16조원을 썼다. 르네사스의 시바타 히데토시 사장은 "10개 정도 인수후보는 항상 있다"며 더 먹어치울 자신이 있음을 시사했다.

최근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뒤늦게 드러났다. 2019년 하반기 일본 경산성의 움직임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 기업에 타격을 줄 요량으로 경산성이 고순도 불화수소 소재 수출규제를 가할 당시 다른 한쪽에서는 세계 1위 대만 반도체 파운드리(생산 전문기업)인 TSMC의 공장 유치를 위해 구애작전을 펼쳤다는 것이다.

일본의 '읍소전략' 끝에 약 2000억원 규모의 TSMC의 반도체 후공정 기술 연구시설이 조만간 도쿄 인근에 건립된다. 일본 정부는 반격의 기회를 찾은 듯하다.
반도체 전공정 과정의 패러다임이었던 '무어의 법칙'이 이른바 '모어 댄 무어(more than Moore), 후공정 과정으로 중심축이 옮겨가면서 추격권에 들어왔다는 분위기다. 체면도 집어던진 국가 주도형 반도체 쟁탈전이 전개되면서 35년 전 일본이 그랬듯, 어느 편에서든 한국의 팔을 꺾으려 들지 모른다. '한국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ehcho@fnnews.com 조은효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