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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줌인] 어둠이 내려앉다 '12.12 쿠데타'

<정변의 역사 ①> 
군부 독재의 불필요한 연장 
전두환의 신군부 쿠데타 전말 

[역사줌인] 어둠이 내려앉다 '12.12 쿠데타'
[파이낸셜뉴스] "전두환이가 불순한 장난을 치고 있는 것 같다" -이건영 3군 사령관(중장)

1979년 12월 12일, 일단의 군인들이 중심이 된 쿠데타가 18년 만에 또 다시 발생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노태우 9사단장을 필두로 한 신군부 세력은 당시 계엄사령관이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해가는 패륜적 하극상을 자행한다. 이어 수도권 일부 병력과 전방 부대 병력이 전두환과 신군부의 이름으로 평양 주석궁이 아닌 서울의 국방부와 육군본부로 물밀듯이 진격해 들어온다. 12월 12일의 그 날 밤. '참 군인'들은 몰락하고, 육사 11기를 중심으로 한 '하나회' 정치군인들이 득세하게 된다.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은 또 다시 사라지고, 군부 독재가 불필요하게 연장되는 어둠이 내려앉은 것이다.

■사건의 발단
10.26 사건으로 18년 동안 장기집권을 했던 박정희 정권이 무너졌다. 이를 계기로 정치범 석방 등 사회를 옥죄던 유신체제의 억압이 완화되면서 국가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는 듯 했다.

군부 내에서도 변화 움직임이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이던 정승화 총장(대장)은 박정희 정권 시절 군부 내 사조직을 만들고 정치 행위를 일삼던 군인들을 좌천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정 총장이 겨냥한 군인들은 다름 아닌 전두환 보안사령관(소장) 등 육군사관학교 11기가 중심이 된 '하나회' 멤버들이었다.

이들은 '구(舊)군부'를 의식해 박정희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키운 '신(新)군부'였다. 박 대통령의 비호 아래 전두환 등은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10.26 사건으로 든든한 뒷배경은 사라지게 됐다. 정 총장은 사건 직후 우선 군부 내 요직에 충실한 군인들로 정평이 난 인물들을 앉히며 지휘 계통을 개편해 나갔다.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윤성민 참모차장 등이 대표적이다.

아울러 당시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만나 군 인사 문제를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정 총장은 문제가 되는 신군부의 핵심적인 인물들을 지방으로 좌천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노 장관은 즉답을 피하고 좀 더 시간을 두고 고민해 보자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정 총장이 당초 계획했던 즉각적인 인사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보안은 새면서, 전두환에게도 정 총장의 계획이 보고되기에 이르렀다.

■하극상의 시작, 정승화 총장 강제연행
당시 전두환은 박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을 수사하는 '합동수사본부장'이었다. 나라를 뒤흔든 사건에 대한 수사의 책임자였던 만큼,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10.26 사건에 대한 수사를 한창 진행하던 중 정 총장의 인사 기밀을 접한 전두환은 자신의 최측근인 허화평 보안사 비서실장,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 등을 불러모았다. 이 자리에서 전두환 등은 10.26 사건에 있어 정 총장의 '혐의점'을 발견한 후 강제 연행할 계획을 세웠다. 그 혐의점이란 10.26 사건 당시 정 총장이 사건 현장에 있었고, 김재규의 '내란' 행위를 방조했다는 것이다. 또한 정 총장이 김재규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았다는 확인되지 않은 혐의도 추가했다.

이후 전두환은 정 총장 연행 및 추후 행동과 관련한 구체적인 계획을 모의하기 위해 11월 중순 노태우 9사단장, 유학성 국방부군수차관보, 황영시 1군단장, 차규헌 수도군단장 등을 만났고, 최종적으로 12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아울러 박희도 1공수여단장, 박준병 20사단장, 최세창 3공수여단장, 장기오 5공수여단장 등과도 사전 접촉했다. 비로소 '쿠데타' 계획이 정식으로 수립됐고, 실제 거사가 벌어지면 이들이 지휘하는 부대는 국방부 및 육군본부의 명령이 아닌 전두환의 명령에 의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것이었다.

운명의 날인 12월 12일 저녁.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병력 50명은 정 총장이 머물고 있는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기습적으로 난입했다. 이들은 공관을 지키고 있던 경비원들을 총격을 가해 제압했고, 정 총장에게도 기관총을 들이대며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했다.

이들이 당시 현장에서 밝혔던 정 총장 연행 이유는 김재규로부터 돈을 많이 받았으니 이와 관련해 총장의 직접적인 증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증언은 공관이 아닌 자신들이 준비한 별도의 장소(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해야 한다고 첨언했다. 정 총장이 최규하 대통령(당시 권한 대행)이 지시한 것이냐고 묻자 이들은 "재가가 있었다"고 답했다. 정 총장은 이를 믿지 않았고 대통령에게 확인 전화를 하려는 찰나에 강제로 체포, 연행됐다. 물론 정 총장 연행과 관련한 대통령의 사전 재가는 없었다.

■대통령 재가 거부와 장태완의 포효
같은 시각, 전두환은 직접 최규하 대통령을 만나 정 총장 연행에 대한 재가를 요구했다. 자신의 '직속상관'에게 물리적 강제력을 행사하는 중대한 일인 만큼, 대통령의 사전 재가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전두환이 최 대통령에게 밝힌 정 총장 연행 이유는 10.26 사건 방조 및 새로운 혐의점(돈을 받은 것 등) 발견이었다.

하지만, 최 대통령은 이를 재가하지 않았다. 그는 시종일관 국방부 장관을 만나 논의를 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정 총장 강제연행시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발생한 총격전 소리에 놀라 급히 몸을 피한 상태였다.) 대통령의 계속된 거부로 인해 전두환은 사전 재가를 받는 것을 포기하고, 쿠데타를 지휘하는 장소인 경복궁 30경비단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장세동 등 쿠데타를 함께 실행하는 인물들이 모여있었다.

전두환 등이 추후 대책에 대해 논의하던 중 갑자기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정 총장이 중용했던 장태완 수경사령관이었다. (앞서 전두환 세력은 정 총장 연행 직전에 정 총장의 최측근들인 장태완, 정병주, 김진기 등을 연희동 요정 연회로 유인해 묶어 놓았다.) 장태완은 이들에게 정 총장을 즉각 원상복귀시키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유학성 등이 장태완에게 경복궁으로 와서 함께 하자며 거듭 회유하자 장태완은 "너거들한테 선전포고다 임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라고 포효했다. 장태완의 이 같은 모습은 아직까지도 '참 군인'의 표본으로 회자되고 있다.

■보안사의 감청공작
장태완의 강경한 태도에 전두환 등의 대응도 빨라졌다. 느긋하게 있다가는 장태완의 전차 부대가 밀고 들어와 포문을 열 것이라는 위기감이 증폭돼 있었다. 전두환은 박희도 1공수여단장에게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무력으로 장악할 것을 명령했다. 1공수여단이 출동하자 장태완은 박희모 30사단장에게 연락해 1공수여단의 진입로인 행주대교를 봉쇄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전두환 보안사령부의 위력이 발휘된다. 보안사는 군의 정보기관이었다. 보안사는 군대 내 통신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고, 장태완 등의 통화를 실시간으로 감청, 동향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 또한 각급 부대의 보안사 요원들을 통해 육군본부 등이 동원하려는 부대의 지휘관들을 설득, 부대 동원을 사전에 봉쇄해버렸다. 결국, 보안사의 감청공작으로 1공수여단은 무난하게 행주대교를 통과해 서울로 진입할 수 있었다.

■9공수여단, 운명의 회군
전두환은 12.12 쿠데타를 시행하기에 앞서 유사시 어느 부대보다 신속하게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4개 공수여단 중 1,3,5공수여단을 쿠데타에 끌어들였다. 하지만 남은 9공수여단은 포섭하지 못했던 만큼, 전두환은 쿠데타 당일 밤 이 부대의 출동을 우려하고 있었다.

마침 감청공작으로 행주대교를 무사 통과했던 박희도의 1공수여단은 육군본부의 집요한 명령으로 원대복귀하게 됐다. 이어 9공수여단의 서울 출동이 이뤄지면서 전두환은 최대 위기를 맞이했다. 박희도는 신속하게 자신의 부대(1공수여단)로 돌아가 직속상관인 특전사령관의 명령도 무시한 채 원대복귀한 1공수여단을 다시 서울로 출동시켰다. 육군본부 측의 9공수여단과 전두환 측의 1공수여단이 서울에서의 무력 충돌을 앞두고 있는 '폭풍 전야'와 같은 상황이 도래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전두환 측은 결과적으로 자신들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는 묘안을 육군본부에 제안했다. 그것은 서울에서 '내전'이 발생할 수 있으니, 각자가 동원한 부대를 동시에 원대복귀시키자는 것이었다. 일종의 '신사협정'을 제안한 것이었는데, 육군본부는 전두환 측을 믿고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는 거짓 제안이었다.

결국, 9공수여단은 육군본부의 명령으로 회군을 결정했다. 육군본부는 전두환 측의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카드를 스스로 거둬들였던 것이다. 반대로 전두환 측의 1공수여단은 다시 행주대교를 지나 서울에 있는 육군본부와 국방부로 빠르게 진입해 들어갔다. 뒤이어 전방에 있던 노태우의 9사단 병력도 중앙청으로 진입했다. 전두환 측의 부대에 대항할 수 있는 병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육군본부와 국방부 등을 장악한 전두환 측은 끝까지 저항 의지를 불태웠던 장태완, 정병주 등을 체포해 서빙고 분실로 끌고 갔다. 이어 행방불명됐었던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찾아내 정 총장 연행에 대한 승인을 얻어냈고, 대통령에게도 사후 재가를 받았다. 그렇게 하룻밤 만에 12.12 쿠데타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쿠데타 이후
쿠데타 직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권력을 장악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일개 별 두개짜리 소장이었던 전두환이 사실상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다. 이후 전두환 측은 비상계엄을 확대하는 '5·17 쿠데타'를 감행하고, 광주 민주화 운동 등을 무력으로 진압하며 마침내 실질적으로 권력의 정점에 올라섰다.

하지만, 쿠데타를 막고자 했던 군인들은 비참한 결과를 맞이했다. 정 총장은 모진 고문을 받은 후 육군참모총장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됐고 강제로 전역을 당했다. 정 총장과 뜻을 같이 했던 장태완과 정병주 등도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12.12 쿠데타는 그것을 주도했던 전두환,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80년부터 1993년까지는 정당화됐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됐다. 아울러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12.12 쿠데타에 대한 재수사가 이뤄졌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