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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톡] 마윈의 꿈과 현실

[차이나 톡] 마윈의 꿈과 현실
어렸을 적부터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다. 그나마 관심을 갖던 것은 영어였다. 이마저도 영어 자체로 매력을 느낀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을 때 말대꾸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어로 답하면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다.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으니 대학 입시도 난관일 수밖에 없다. 두 차례 낙방한 후 삼수 만에 정원미달이던 항저우사범대학 영문과에 겨우 입학했다. 졸업한 후에는 4년가량 영어교사를 거쳐 1992년 하이보라는 통역회사를 차렸다. 하지만 초기 수입이 월세 2000위안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700위안에 불과했다. 어쩔 수 없이 꽃 등을 팔면서 근근이 회사를 꾸려나갔다.

그나마 상황이 조금 나아진 시점인 1995년 초, 통역사 자격으로 중국 무역대표단의 미국 시애틀 출장에 동행한 것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놨다. 친구 소개로 인터넷을 접한 뒤 귀국해 그해 4월 중국 최초의 인터넷기업인 '하이보인터넷'을 창업했다. 기업 홈페이지를 만들어주는 게 주된 일이었다. 다시 4년이 지난 1999년 3월 중국 저장성 항저우의 호숫가 아파트에서 50만위안(약 8500만원)을 가지고 회사를 창업했다. 그 유명한 알리바바는 이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이는 마윈의 얘기다.

마윈은 한때 중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세 손가락에 들 정도로 추앙을 받았다. 미국에 대한 경쟁심과 열등감을 갖고 있던 중국에서 아마존, 이베이를 능가하는 세계 최대의 전자상거래 업체를 키워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의 성공 스토리는 책으로, 다큐멘터리 등으로 널리 알려지고 퍼져 나갔다. 청년들에게 마윈은 인생의 롤모델이었고 중국인들에겐 자긍심 그 자체였다. 인터넷상에선 '국민아빠'로 불렸으며 마윈과 비슷하게 생긴 소년은 인터넷 스타로 등극하기도 했다. 그의 인지도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랬었다.

하지만 이런 마윈이 이제 중국에서 사라지고 있다. 사람들의 입에서, 인식에서 조금씩 존재감이 약해지는 것이 현실이다. 중국 방송과 관영 매체에선 마윈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중국 포털사이트 바이두에서 마윈을 검색하면 그마나 나오는 내용은 마윈이 술집에서 보디가드들에게 둘러싸여 술을 마시고 있다는 정도의 가십기사다. 마윈의 공식적인 움직임도 없다. 그가 만든 알리바바의 인터넷 브라우저까지 중국 앱스토어에서 삭제됐다. 마윈을 닮은 소년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청년들도 더 이상 마윈을 거론하지 않는다.

마윈의 인생을 가른 것은 지난해 10월이다. 상하이 금융서밋에서 금융당국이 '위험 방지'를 앞세워 지나치게 보수적인 감독정책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한 이후 마윈의 시련은 시작됐다.

정부에 여러 차례 불려나가 공개질타를 받았고, 사상 최고액수의 과징금도 내려졌다. 최근엔 계열사 지분 매각 압력까지 받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천문학적 자산을 갖고 있는 마윈에겐 이런 정도의 난관은 극복하지 못할 수준까지는 아니다. 최정상 자리에 오르면서도 수차례 시련을 이겨냈다.

오히려 마윈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들에게 잊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중국 소식통은 "찾는 이도, 가까이 하려는 이도 사라진 지금이 마윈에겐 사형선고와 같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중국에 부임한 후 깨달은 것 중 하나가 절대 권력에 반기를 든 이들의 처참한 말로다. 사례도 충분히 보아왔다. 그러나 마윈은 이마저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꿈꿔왔을까.

jjw@fnnews.com 정지우 베이징특파원
jjw@fnnews.com 정지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