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변의 역사 ②>
조선 왕조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버린
수양대군의 계유정난 전말
세조 어진 초본
[파이낸셜뉴스]
수양대군 "대감의 얼굴을 보면 일흔까지 장수할 상인데. 올해 춘추가 어찌 돼요"
김종서 "올해 일흔입니다"
수양대군 "제가 올해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김종서 "어떤 소원입니까"
수양대군 "왕이 되는 것이오"
김종서 "네 이놈, 네 무슨 수작이냐"
-영화 '관상' 中
조선 초기, 왕조 역사의 큰 물줄기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정변이 일어났다. 계유년(癸酉年)인 1453년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과 그 일파들이 여러 대신들 및 반대파들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계유정난은 조선 초기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이후 조선 역사의 향방에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선 적장손 왕위 계승 등 조선의 헌정질서가 흔들리는 단초를 제공했다. 세종, 문종, 단종으로 이어지면서 자리를 잡아가던 유교적 헌정질서를 왕실 종친이 앞장서 무너뜨린 사건은 당대의 유학자는 물론 후대의 역사가들에게도 큰 충격을 줬다.
더욱이 계유정난을 계기로 조정에 '공신(功臣) 세력'이 득세하면서 태종 때처럼 왕권이 오롯이 서지 못하고 되레 공신 세력을 의식하는 모습이 나타났고, 조선 건국의 명분을 제공했던 고려 권문세족들의 부패한 특권 문화가 조선 공신 세력에게 고스란히 전수되는 상황도 발생했다. 이후 조선에서는 사화, 환국 등 유혈 정권교체가 있을 때마다 승리자의 자축 세리머니라고 할 수 있는 '공신 인플레이션'이 일반화 됐다. 태종 이방원과 정도전이 기필코 타파하고자 했던 문제점이 조선의 정치 및 역사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비극의 씨앗, 문종의 죽음
1452년 5월, 세종대왕의 아들이자 단종의 아버지, 그리고 수양대군의 친형이었던 문종이 세상을 떠났다. 왕위에 오른 지 불과 2년 만의 일이었다. 문종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는 한마디로 '준비된 왕'이었다. 실록에 따르면 문종은 과학, 천문, 병법, 무예, 음악, 음운 등 다방면에 통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세종 때 발명된 측우기와 화차(이동식 대포)는 문종이 제시한 생각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더욱이 외모도 매우 출중했다.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왔을 때 문종을 보고는 "이 나라는 산천이 아름답기 때문에 인물도 이렇게 아름다운가"라며 감탄을 했다고 한다. 세종대왕의 치세 마지막 7년 정도는 사실상 문종의 치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세종대왕 말기엔 문종이 대신 정사를 돌보기도 했다.
그러나 문종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건강이 좋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세종 말기 때 과도한 업무와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에 따른 연이은 3년상으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군으로 칭송을 받았던 아버지에 버금가는, 아니 어쩌면 아버지를 능가할 수도 있었던 전도유망한 왕이 죽자 조정 대신들과 백성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실록은 "임금이 승하하자 이를 슬퍼하는 것이 선왕(세종) 때보다 더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문종의 뒤를 이어 그 아들인 단종(이홍위)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단종은 그 나이 만큼이나 정치적 기반도 취약했다. 보통 어린 임금이 즉위하면 가장 서열이 높은 대왕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지만, 당시 단종 곁엔 수렴청정을 할 대비도 없었다.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 권씨가 단종을 낳은 직후 산욕열로 죽었고, 문종은 다시 세자빈을 들이지 않았다. 후궁으로 귀인 홍씨, 양씨만을 뒀다.
■조정의 세력구도
문종의 죽음과 단종의 즉위를 계기로 조정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게 흘러갔다. 세종이 일궜던 태평성대는 서서히 사라져갔고, 다시금 불길한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당시 조정의 세력구도를 보면 크게 고명대신파와 대군파로 나뉜다. 고명대신파는 왕의 유언을 받은 대신들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가 있었다. 문종은 죽기 전에 이들을 불러 단종을 잘 보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후 좌의정 남지가 죽자 김종서가 좌의정, 정분이 우의정으로 임명됐고, 김종서와 황보인 두 고명대신이 조정의 주도권을 잡아가는 모양새를 나타냈다.
반면, 다른 한쪽엔 단종의 숙부인 대군들이 있었다. 대군들은 총 7명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두드러졌다. 문인보단 무인의 기질이 엿보인 수양대군은 한명회와 권람 등을 책사로 두고 서서히 무인 중심으로 세력을 모으고 있었다. 안평대군은 기본적으로 문인의 기질을 타고났다. 문학·예술 등에 능했고, 자연스레 이 방면의 인사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정치적 기반이 취약했던 단종은 잠재적 대권주자가 될 수 있는 대군들보단 아버지 문종이 신뢰했던 최측근들인 고명대신들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 보니 대신들의 합의체인 의정부가 국왕을 보필하고 정사를 협의하는 최고 정무기관으로서의 본래 임무를 넘어서는 듯한 모습도 나타났다. 이는 추후에 수양대군이 정변을 일으키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고명대신들이 야심을 품고 권력을 넘보거나 국정을 농단하려 한 것은 아니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단종의 신임을 받은 김종서 등 고명대신들은 특별히 혈기왕성한 수양대군을 경계했고, 수양대군 역시 고명대신들 및 안평대군의 세력화를 경계하며 상호 간 세력경쟁 양상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수양대군의 야심
당초 수양대군은 왕위를 꿈꿀 수도 없는 위치에 있었다. 친형인 문종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수양대군은 상대적으로 가려진 존재였었고, 단종이 즉위한 이후엔 고명대신파 및 다른 형제들의 견제가 심화됐다. 아울러 왕조 국가에서 왕의 형제들은 숨죽이고 살아야만 하는 비운(悲運)을 갖고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수양대군은 단종 즉위 직후부터 왕권을 향한 야심을 드러낸 것으로 알려졌다. 단종이 즉위한 후 2개월이 지나 수양대군은 자신의 집에서 권람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정국 현황과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논했고, 이후 야심을 갖고 권람, 한명회, 홍윤성 등을 심복으로 만들었다. 특히 한명회는 추후 계유정난 및 세조 치세의 설계자가 된다.
왕권을 향한 수양대군의 거사 계획이 구체화된 것은 1453년 4월부터다. 이는 수양대군이 단종의 즉위를 알리는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로 명나라를 갔다 온 직후다. 수양대군이 고명사은사로 가기 전 권람 등은 이를 완강하게 반대했다. 자리를 비운 사이 김종서 등이 수양대군파에 대한 제거를 획책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수양대군은 웃으면서 "김종서 등은 그럴만한 호걸이 아니다"라며 명나라로 가는 길에 올랐다. 실제로 수양대군이 부재할 때 고명대신파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명나라에서 돌아온 수양대군은 한편으론 고명대신파의 행동에 불만을 품고 있던 신숙주 등 집현전 출신 문인들을 끌어들이고, 또 다른 한편으론 홍달손, 양정 등 심복 무사를 양성하며 거사 준비를 착실히 해나갔다. 거사 직전 수양대군 휘하엔 30여 명에 이르는 정예 무인들이 모여있었다.
■계유정난
1453년 10월 10일 밤, 마침내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조선 왕조 역사의 큰 물줄기가 변화되는 밤이었다. 우선 수양대군은 삼정승 가운데 가장 지혜와 용맹이 뛰어난 김종서를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양정, 임어을운 등을 대동한 채 돈의문 밖 김종서의 집으로 향했다.
수양대군이 방문하자 김종서와 그의 아들 김승규가 직접 맞이했다. 김종서와 정면으로 마주한 수양대군은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대뜸 "사모(紗帽)의 각이 떨어졌으니 좌상의 것을 빌릴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는 김종서 부자의 경계를 느슨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런 다음 수양대군은 청이 있다면서 김종서에게 편지 한통을 건넸고, 김종서는 달빛에 편지를 비춰봤다. 그 순간 임어을운의 철퇴가 김종서의 머리를 내리쳤다. 동시에 양정의 칼날이 김승규를 베었다. 미처 반격할 틈을 갖지 못한 채 세종 시절 천하를 호령했던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가 쓰러졌다.
9부 능선이었던 김종서 제거에 성공하자 수양대군과 정예 무인들은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이들은 곧바로 단종이 있는 궁궐로 쳐들어갔다. 공포감에 사로잡힌 단종 앞에서 수양대군은 김종서, 황보인 등이 난을 일으켜 안평대군을 추대하려 했기에 김종서를 척살했다는 거짓보고를 올렸다.
뒤이어 수양대군은 왕명을 빙자해 조정 대신들을 모두 입궐시키도록 했다. 한명회는 '살생부(殺生簿)'를 들고 입궐하는 대신들을 일일이 확인하며, 사전에 배치한 군사들에게 '살조(殺條)'로 분류된 대신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했다. 이때 대표적인 수양대군 반대파들인 황보인과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민신, 우찬성 이양 등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한편, 불의의 기습을 당한 김종서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철퇴를 맞고 쓰러진 김종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났고, 수양대군의 모반 사실을 인지한 후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가마에 올랐다. 단종을 지키기 위해 궁궐로 들어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수양대군 세력에게 포섭된 숭례문, 돈의문, 서소문 등의 수문장들은 모두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진입로가 막힌 김종서는 사돈집에 숨어 있다가 이튿날 수양대군이 급파한 군사들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공신 득세, 단종의 비극
하룻밤 만에 세상이 바뀌었다. 조정의 실권을 틀어쥐고 있던 고명대신파 등은 온데간데 없고, 수양대군 및 그 일파들이 권력의 정점에 올라섰다.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부사·영집현전사·영경연사·영춘추관사·영서운관사·겸판이병조·내외병마도통사 등 다양한 요직을 겸하면서 정권과 병권을 동시에 장악했다. 그리고 거사에 직간접적으로 공을 세운 한명회, 권람, 정인지, 양정 등 43인을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책봉했다. 앞으로 이들은 오랜 기간 세조 주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비극적인 피바람은 계속 휘몰아쳤다. 안평대군은 붕당을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사사를 당했고, 정분, 조수량, 안완경 등 수양대군 반대파들도 귀양을 간 후 교살당했다.
든든한 우군들이 사라진 단종은 그야말로 '사상누각'과 같은 존재가 됐다. 수양대군 세력에 대한 공포감을 못이긴 단종은 2년 뒤 수양대군에게 선위(禪位)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단종은 상왕 자리에서도 오래 머물러 있지 못했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등 집현전 학사 출신의 대신들(사육신)과 일부 무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된 후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나게 됐다. (단종이 거처했던 영월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육로는 험준한 절벽으로 막혀 있었다.)
그런데 유배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세조'가 된 수양대군에게 있어 단종은 지속적인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단종이 살아있는 한 정통성 시비는 끊임없이 불거질 가능성이 높았다. 더욱이 단종 복위운동이 또 다시 일어나면서 수양대군의 위기감은 높아져 갔다. 결국, 수양대군은 강원도 영월에 사람을 보내 단종을 죽이라고 명했다.
단종의 최후를 기록한 '세조실록'에는 단종이 (단종 복위 운동을 주도한) 송현수가 교형에 처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상심한 나머지 스스로 자결했다고 나와있다. 이어 세조는 단종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며 그 시신을 후하게 장사 지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선조실록'에는 단종이 사사(賜死)된 것으로 나와있고, 정황 상 그 시신도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야사'에 따르면 금부도사 왕방연이 세조의 명으로 사약을 들고 단종을 찾아왔는데, 왕방연은 차마 단종에게 사약을 건네지 못했고 그저 말없이 엎드려 통곡을 했다. 이를 본 단종은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고 자결을 결심했다고 한다.
이때 단종은 자신의 목에 줄을 매고는 줄을 방 밖으로 빼내 하인에게 힘껏 당기게 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이처럼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강원도 영월에서 한 많은 삶을 살던 어린 왕은 비정한 권력의 피비린내 앞에서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후 단종은 200년도 더 지난 1698년 숙종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복권될 수 있었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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