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창설 60주년을 기념해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이라는 새 원훈이 최근 국정원 청사 앞 표지석에 놓였다. 원훈석의 글씨체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0년간 복역한 고(故)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의 손글씨를 본뜬 '신영복체'이다. (사진 제공=국가정보원) /사진=뉴시스
2016년 타계한 신영복 전 성공회대 교수. 이념으로 갈린 한반도 분단사에서 그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이도 드물다. 육군사관학교 교관이었던 그는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북한 노동당의 지령과 자금을 받았다는, 이 지하조직에 연루된 혐의였다. 1988년 전향서를 쓰고 복역 20년 만에 가석방됐다.
출소 후 그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 저서를 통해 진보 지식인으로 이름을 알렸다. 서예에도 조예가 깊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글씨체는 소주 상표인 '처음처럼'을 통해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 이후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 '사람이 먼저다'에도 쓰였다. 문 대통령이 평소 존경하는 사상가로 꼽은 그의 손글씨를 본떠 만든 '어깨동무체'(신영복체)가 한층 유명해진 배경이다.
'신영복체'가 예기치 않은 논란에 휩싸였다. 국가정보원이 새 원훈석(院訓石)에 쓰인 글씨체로 이를 채택하자 전직 국정원 정보요원들이 반발하면서다. '국가안보를 걱정하는 전직 국정원 직원모임'은 21일부터 릴레이 시위에 돌입했다. 국정원 정문과 후문 등 시위 현장엔 "간첩글씨체 원훈석 깨부수자" 등의 피켓까지 등장했다. 국보법 위반으로 복역했던 이의 필체가 국정원의 상징이 되어선 곤란하다는 주장이다.
국정원 원훈은 전신인 중앙정보부 창설(1961년) 후 37년간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였다. 초대 부장 김종필 전 총리가 지었다. 김대중정부는 이를 '정보는 국력이다'로 바꿨고, 이명박정부는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으로 고쳤다.
문재인정부는 최근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원훈을 다시 변경했다.
지난 4일 신영복체 원훈석 제막식도 가졌다. 그러나 원훈석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로 세워지기 일쑤였다는 게 문제다. 앞으로 새 정권이 들어서 이런 관행이 되풀이된다면? 이번에 임기 말 정부가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꼴이 될 듯싶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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