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대에 걸쳐 500여년을 이어간 조선시대 왕들 중 무려 9명가량이 마음의 병으로 수명을 재촉했다. 정사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은 왕이 없었겠지만,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사망원인과 직간접적 연관성을 열어놓고 있다. 1대 태조(화병)를 시작으로 7대 세조(불면증), 10대 연산군(화병), 11대 중종(화병)에 이어 13대 명종(심열)부터 16대 인조(화병)까지 2명 중 1명꼴이었다. 정치적 격랑기 외에도 전란과 빈번한 역병 창궐 등으로 편치 않은 날의 연속이었다. 특히 19대 숙종(심화증)이 그랬다. 재위 46년간(1675~1720) 25번이나 역병이 번졌다. 당시 전염병 진화에 짧아도 수개월이 걸린 것을 감안하면 숙종 시대는 사실상 역병과 전쟁시기나 다름없었다.
전염병 장기전에 왕조차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졌으니 백성들은 오죽했을까. 1699년 숙종이 "전염병이 잦아들면 혜택을 베풀고 제사를 지내 원통한 마음을 위로해주라"고 지시한 것도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일종의 심리방역이다.
코로나19가 델타변이로 다시 맹렬한 기세를 떨치면서 피로감과 무력감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늘고 있다. 코로나19뿐 아니라 단절된 외로움과 방역일탈 유혹 등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이겨내야 하는 고단함이 언제 마침표를 찍을지 알 수 없다는 게 불안감을 더 키우는 듯하다.
정부 조사에서도 나타난다. 보건복지부의 올해 2·4분기 '코로나19 국민 정신건강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울위험군(18.1%), 자살위험군(12.4%)이 각각 10%를 넘는다. 10명 중 1명 이상이 심각한 수준의 우울증과 자살충동을 느끼고 있는 셈이다. 2019년 3~4% 수준과 비교해도 월등히 높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아랍속담처럼 일상의 불안감이 지속되면 정신 건강을 저해하기 마련이다. 지인의 직장(유통업종) 관계자는 지난해 이후 임시선별검사소에서 10차례 이상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이 정도면 무뎌졌을 법하지만 심란했을 가족과 가까운 직장동료 등을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한다. 검사를 받든 안받든 국민 모두가 고강도 방역조치에도 코로나 역주행과 장기화가 이어지면서 불안정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긴병에 효자 없듯 육체적 감염보다 정신적 고통이 더 크게 느껴지는 시기다.
이 때문에 '심리방역'이 이제는 단순한 수사로 들리지 않는다. 정부가 말하는 심리방역은 코로나19 장기화로 심신이 지친 국민들의 심리적 불안, 공포, 분노 등의 정신적 고통과 스트레스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정신건강적 대응 방안이다. 이를 위해 상담전화와 심리지원 창구 등을 운영 중이다.
다만 정부의 역할은 한계가 있다. 주변의 격려와 배려가 더 값진 때다. 도쿄 올림픽에서 여자배구팀이 보여준 불굴의 투혼이 범실에도 서로를 응원해주는 원팀 정신으로 더 빛났던 것처럼 공감과 공존의 가치 확산이 마음의 백신이 될 수 있다.
끝모를 장기전에 자포자기식 방역체계 전환까지 제기되고 있지만, 후손들에게 지독한 코로나를 물려줄 순 없다. 백신개발과 함께 물리적·심리적 방역에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코로나 종식시기는 언젠가 다가올 것이다. 그때까지 코로나에 대한 사회의 심리적 안전망을 다지는 것 역시 개인이 아닌 우리의 몫이다.
winwin@fnnews.com 오승범 산업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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