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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뉴스]
#1. 30대 남성 A씨는 지난 2019년 5월 동국대학교 한 강의실 앞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가져간 피해자의 신발에 자신의 정액을 넣은 뒤 다시 신발장에 가져둔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A씨에 재물손괴 혐의를 적용해 검찰에 송치했다. 검찰은 훼손된 신발 가격보다 10만원 더 많은 벌금 50만원에 B씨를 약식기소했다.
#2. 30대 남성 B씨는 지난해 11월께부터 약 7개월간 수도권 지하철역을 돌아다니며 불특정 다수 여성들의 가방이나 옷 주머니에 자신의 체액이 담긴 피임기구를 몰래 넣은 혐의를 받는다. 경찰은 B씨에게 재물손괴,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공중밀집장소에서의 추행) 등 혐의로 B씨를 검찰에 송치했다.
최근 불특정 다수 여성들을 상대로 자신의 체액이 담긴 피임기구를 몰래 집어넣는 이른바 '정액 테러' 사건이 발생해 사회적 공분을 샀다. 여론은 사건 발생 자체에도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해당 남성에게 적용한 혐의를 두고 회신들마저 주목하기도 했다.
'정액 테러'를 저지른 위 두 남성의 혐의를 가른 것은 '신체 접촉 여부'였다. A씨에게는 직접적인 신체 접촉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재물손괴죄만 적용됐다.
■정액 테러 41건 중 15건은 '재물손괴죄'
현행법상 정액을 텀블러, 옷 등에 묻히는 행위만으로는 이를 성범죄로 처벌하기 어렵다. 법적 근거가 없어서다.
22일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9년부터 지난 7월 말까지 접수돼 수사 중이거나 검찰에 넘겨진 '정액 테러' 사건은 총 41건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15건은 강제추행이 아닌 재물손괴 혐의가 적용됐다. 발생 사건 3건 중 1건꼴로, 피해자의 신체가 아닌 신발, 옷에 정액을 묻힌 경우다.
최진녕 변호사(법무법인 씨케이 대표)는 "유추해석을 금하는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물건에 정액을 묻히는 행위는 그 자체로 성적 수치심을 야기하거나 음란한 행위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하는 것"이라며 "결국 재물손괴죄로 처벌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관련 법안은 국회 계류 중
21대 국회 들어 '정액 테러'도 성범죄 테두리 안에서 처벌해야 한다는 법안이 잇따라 발의됐지만, 여전히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11월 형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아직 계류중이다. 해당 개정안은 성적인 목적으로 물체, 물질 등을 이용해 상대방의 동의 없이 추행한 경우 1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액 테러 등 여러 형태로 일어나는 성추행에 대한 처벌 근거를 마련하자는 취지다.
하지만 이 개정안은 지난해 12월 소관 상임위원회인 법제사법위원회에 한 차례 회부되는 데 그쳤다.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지난달 신체 접촉이 없더라도 성적 혐오감을 일으키는 물건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성범죄로 처벌할 수 있는 내용을 담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 대표 발의했다.
최 변호사는 "정액 테러 등을 성범죄로 처벌할 수 있는 새로운 구성요건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며 "사회변화에 따라 형법이 사회현상이 따라가지 못하면 법을 바꿔서라도 그런 부분을 규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외신들도 정액 테러를 성범죄로 처벌하지 못한 한국에 주목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지난 12일(현지시간) 피해여성에게 정액과 가래 등을 탄 커피를 준 남성에게 성범죄가 성립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clean@fnnews.com 이정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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