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코마 日 만화앱 중 1위… 글로벌 매출도 5위 차지
종이만화 굳건한 현지서 디지털 만화로 정상에
K-플랫폼 앞세워 ‘만화판 넷플릭스’ 도전장
이태원 클라쓰의 일본어판인 '롯폰기 클라쓰'
【파이낸셜뉴스 도쿄=조은효 특파원】"일본 만화업계에 흑선(구로후네)이 출현한 것인가." "한국식 웹툰의 세로 스크롤 방식이 디지털 만화 시장의 새로운 표준이 될 지 모른다." 1853년 미국 매튜 페리 제독의 개항 요구는 일본이 서구 사회의 질서에 눈을 뜨게 된 상징적 사건이다. 페리 제독이 끌고 온 증기선 '흑선'은 일본에는 일반적으로, 충격적이며 참신한 외부 자극을 일컬을 때 비유적으로 사용되곤 한다. 일본 만화업계에서는 카카오 재팬의 디지털 만화 플랫폼 '픽코마'와 한 발 먼저 뛰어든 네이버 라인의 '라인 망가'가 상호 경쟁 관계를 형성하며, 디지털 만화 시장에서 주도권을 거머쥐자 '흑선 출몰'의 충격에 빗대고 있다.
이 가운데 현재 일본 디지털 만화 앱(플랫폼)시장의 1위는 카카오 재팬의 픽코마다. 픽코마는 서비스 개시 4년 3개월 만인 지난해 7월 일본 전체 디지털 만화 플랫폼 업계에서 처음으로 1위를 기록한데 이어 9월 현재 일본 시장 점유율 65%로 1위를 달리고 있다. 올 7월엔 게임을 제외한 전 세계 애플리케이션 매출액(앱 애니 집계)에서 1위 틱톡, 2위 디즈니 플러스, 3위 유튜브 등에 이어 5위에 올라탔다. 누적 앱 다운로드는 3000만회에 육박하며, 일일 이용자만 최고 450만명에 이르렀다. 하루에 서울 인구(약 960만명)의 절반, 도쿄 인구(1400만명)의 3분의 1이 픽코마에 접속해 웹툰(스마툰)을 비롯한 디지털 만화 콘텐츠를 들여다 보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에는 그다지 잘 알려지진 않았으나, 조용하지만 상상 이상의 폭발적 진격이었다. '만화 왕국' 일본에서 케이(K)-플랫폼이 이룬 화려한 숫자, 그 이면에 있을 스토리가 궁금해졌다. 일본의 만화 유저들을 매혹한 '흑선' 픽코마의 가려졌던 5년여간의 시간을 복기하기 위해 지난 10일 일본 도쿄 미나토구 롯폰기에 있는 카카오 재팬을 찾았다.
김재용 대표
■레드오션에서 거둔 J커브
이날의 문지기는 카카오에선 일명 제이(Jay)로 불리는 김재용 카카오 재팬 대표 겸 사장(45)이었다. 코로나19 감염 사태 이후 직원들은 거의 전원 재택근무 중이라 약속 시간 즈음, 보안이 걸린 문을 열어줄 요량으로 사장이 입구 주위를 어슬렁거렸던 모양이다. 입구 우측벽 하얀 벽돌 사이로 노란 벽돌 한 장이 눈에 띄었다. '브라이언'.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의 영어 이름 서명이었다. "김 의장이 갖고 있는 글로벌 사업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자 노란 벽돌에 그의 이름을 새겼다"고 했다. 벽돌 한 장에 담긴 의미를 시작으로, 김 대표는 이야기의 시작점을 열었다.
김재용 대표가 2015년 초 카카오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을 당시, 이미 도쿄의 정보기술(IT)업계에서는 카카오가 일본에서 철수할 지 모른다는 풍문이 파다했다. "언제고 문닫을 지 모른다"는 주위의 수근거림을 뒤로, 합류 결정을 내리고 와서 보니 직원은 고작 16명(현재 약 145명)에 불과했고, 개발자들은 상당수 이탈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범수 의장의 주문은 글로벌 시장 진출이었고, 김재용 대표는 이미 레드오션이라는 일본 디지털 만화 플랫폼 시장에 뛰어들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냐"고 반문해봤다. 6년 전 당시 일본 내 만화 앱, 만화 웹 업체는 100곳이 넘었다. 김 대표는 "종이 만화가 절반을 차지하는 일본 만화 시장에서 디지털 시장의 성장성이 충분이 있다고 봤으며, 100개 서비스 업체들 가운데 독보적 1등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하지만 막상 부딪친 현실은 냉랭했다. 시장에서는 "카카오가 진출하기에 너무 늦었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픽코마 서비스 개시 한 달이 지난 2016년 5월, 애플의 앱시장에선 거래액 200엔(약 2100원), 구글에서는 0엔, 동시접속자 13명, 실적은 말할 수 없이 참담했다. "우선 하루 열람자 1만명 달성을 목표로 하자"고 직원들을 독려했다. 그해 7월 기적같이 1만명을 달성했고, 2주 뒤 2만명으로 올라타더니 10만, 90만, 200만명으로 가파르게 증가했다. 지난해 이용자 평균 하루 356만명, 올해 최고 일간 약 450만명까지 기록했다. 실적도 함께 비례해 올라가면서 경제학에서 말하는 제이(J)커브 곡선을 그렸고, 직원들은 김재용 사장의 영어 이름 제이(Jay)를 딴 '제이 커브'라고들 불렀다.
픽코마 부동의 1위 인기 작품으로 누적 페이지 뷰 5억회를 돌파한 ‘나 혼자만 레벨업'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4학년'
픽코마 어워드 2021 수상작 '갓 오브 블랙필드'
■후발주자, 대역전극 비법은 셋
101번째 후발 주자가 1등을 한 대역전극 궁극의 비법은 크게 3가지로 요약된다. △온라인 사용자들의 특성을 간파한 거래 규칙 변경 △작품에 대한 고집 △구성원들의 절실함이다.
픽코마 서비스는 크게 △만화 △웹툰으로 불리는 스마툰 △소설 등 3가지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일본 웹툰 시장'이라고들 부르고 있으나, 엄밀하게는 틀린 표현이다. 웹툰은 웹과 스마트폰에서 보도록 처음부터 디지털로 제작한 세로 스크롤의 컬러 만화 작품을 의미한다. 이와 달리, 기존 만화책을 스캔해 스마트폰, 웹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게 구현한 것들은 '디지털 코믹'으로 불린다. 태생이 디지털이냐, 종이냐에 따라 불리는 명칭이 다른 것인데, 이 두 유형을 묶어서 부를 만한 용어가 아직 정립된 것은 아니나 '디지털 만화'정도로 부를 수 있다.
픽코마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제공하고 있다. 작품수 기준으로는 99%가 종이 만화를 디지털화한 디지털 코믹이며, 1%가 웹툰이다. 흥미롭게도 매출은 '50대 50대', 1%의 웹툰이 거래액 절반을 짊어진 구조다. 사업 초기엔 당연히 일본 디지털 만화 시장의 주류인 일본 디지털 코믹 확보가 우선이었는데, 거래 방식은 권당 결제였다. 그런데 김 대표가 이 룰을 바꿔보자 제안한 것이다. 만화 1권을 '1화(話), 2화(話),3화(話)...'로 쪼개어 팔겠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은 것이다. 만화광들이 아닌 이상, 재미있는지, 재미없는지도 모르는 만화에 1권씩 결제를 하고, 집중력을 발휘하기란 어렵다. 김 대표는 "분 단위로 움직이는 유튜브, 게임, 스마트폰 유저들을 웹툰 등 만화 시장으로 불어들이기 위해선 부담없는 접근이 필요하다고"고 설명했다. 스낵을 먹듯, 가볍게 즐기는 '스낵 컬쳐'가 온라인 시장의 대세를 이루게 될 것이란 점을 간파한 것이다.
보수적인 일본 만화 출판사들은 화(話)별 판매 방식에 정색했다. 설득은 쉽지 않았다. 1화를 보고 23시간이 지나면 2화 무료 보기권이 생기는 '기다리면 0엔' 이란 마케팅 전략도 출판사들로선 초기엔 냉랭했다. "이용자들이 무료 서비스에 길들여져 끝끝내 유료 결제를 안하면 어떻게 하느냐"우려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장인 그가 "10번, 100번 방문한다는 각오로 직접 찾아다녔다"고 한다. 실제 스무번 넘게 방문한 곳들이 수두룩하다. 그 결과 200여개가 넘는 만화 출판사들이 픽코마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5년여, 화별 판매는 현재 일본 대부분의 만화앱에서 차용하고 있으며, 일본 출판업계 최대 큰 손인 아마존 재팬까지도 킨들 서비스에서 화별 판매를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픽코마가 일본 디지털 만화 유통의 게임의 룰을 바꾼 것이다.
다른 하나의 중심은 '작품에 대한 존중'이다. 김 대표는 "콘텐츠 플랫폼 사업의 핵심은 작품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만화 그 자체로 승부수를 걸고 싶었다"고 했다. 사람이 모이면 돈이 되고, 광고가 가장 쉬운 돈벌이 수단이라는 플랫폼 사업의 광고 비즈니스 유혹을 끊은 것이다. 픽코마는 원칙적으로 광고가 없는 앱 서비스다. 김 대표는 이 점에 자부심을 드러냈다. 좋은 작품을 확보하기 위해선 여전히 일본 전체 만화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종이 만화업계와 교감도 필수적이다. 코로나 사태 이전인 2019년엔 극장 상영관 하나를 빌려, 사업 전략 설명회를 열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만화산업이 공존하도록 하겠다." 현장은 일본 만화업계 종사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마지막 비법은 그와 카카오 재팬 멤버들의 절실함이었다고 했다. 2020년 4월 24일 '오전 6시24분', 다음 날인 4월 25일 '오전 2시28분.' 김재용 대표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픽코마 관련 수치를 직접 관리하는 문서에 기록된 마지막 작업시간들이다. 이 기록으로 그가 말한 절실함은 긴 설명이 필요없을 듯 했다.
■일본을 넘어 세계시장으로
일본 만화잡지의 최전성기로 일컬어지는 1995년, 당시 75세의 전직 총리 미야자와 기이치(1919~2007년)의 칼럼이 청년 주간 만화잡지 '스피리츠'에 연재됐다. '21세기의 위임장'이란 단행본으로 나왔던 칼럼들은 소선거구 문제, 환율, 전후 일본 정치 등을 기술한 것이었다. 전직 총리가 시사 주간지가 아닌 만화 주간지를 택했던 것은 당시만 해도 이 잡지의 연간 발행부수가 무려 150만부였고, 대부분의 독자가 2030세대 청년 유권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미야자와 전 총리의 칼럼을 읽었을 독자들은 지금은 일본의 4050대 중장년층을 형성하고 있다.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은 80세가 넘은 지금도 유명한 만화광이다. 한 때 주춤한 듯 보였던 일본의 만화 산업은 최근 만화 원작의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이 흥행돌풍을 일으키며, 만화 콘텐츠 왕국으로 자존심을 재확인했다.
소니, 덴쓰 등은 앞다퉈 만화 콘텐츠 사업을 들고, 세계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연 6126억엔(약 6조5000억원)으로 추산되는 일본 만화 시장(단행본·만화잡지·디지털 만화)이 그리 간단한 곳이 아니라는 얘기다. K-플랫폼의 돌진은 그런 점에서 분명 주목할 부분이다.
자본시장 업계에서는 카카오 재팬이 지난 5월 싱가포르에서 600억엔(약 6400억원)의 투자를 받았을 당시, 카카오재팬의 시장가치를 8000억엔(약 8조5000억원)정도로 추산했다. 일본 디지털 만화 산업의 성장 가능성, 내년 글로벌 증시 상장 추진, 디지털 만화 시장의 '넷플릭스'를 꿈꾸는 픽코마의 다음 행보를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2019년 거래액 1000억원, 2020년 3000억원을 돌파한 올해 카카오 재팬의 목표는 거래액 1조원이다. 김 대표는 "쉽지 않지만 도전해 볼만 하다. 마지막까지 최대한 달려보자는 생각"이라고 했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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