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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순의 느린 걸음] '가상자산'이라는 미운오리

[이구순의 느린 걸음] '가상자산'이라는 미운오리
SK의 투자전문회사 SK스퀘어가 첫 투자대상으로 가상자산거래소 코빗을 찍었다. 900억을 투자해 단번에 2대 주주로 자리를 잡고 블록체인, 대체불가능한토큰(NFT), 메타버스 사업을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공개했다. 한화투자증권은 올 초 가상자산거래소 업비트를 운영하는 두나무에 600억원을 투자해 9개월여 만에 1조원의 지분가치를 평가받는 '대박'을 터뜨렸다. 게임업체들은 빗썸, 코인원에 앞다퉈 투자를 결정했다. 메타버스, NFT 바람을 타고 요즘 가상자산 사업과 기업들은 그야말로 '귀한 몸'이 됐다.

"가상자산이라는 단어만 디지털자산으로 고쳐주세요. 분위기 잘 아시잖아요. 가상자산이라는 단어 들어가면 사업 못해요." 2019년 모 대기업의 가상자산 사업 움직임 기사를 썼더니 돌아온 수정요청이었다. 정부가 직접 가상자산(암호화폐)이라는 말을 국가적 금칙어로 못박고, 가상자산거래소 운용 기업에 사행산업이라는 낙인을 찍어 벤처기업 인증을 하루아침에 박탈했던 게 3년 전이다. 3년 만에 여야 대통령후보들은 가상자산 투자자를 보호하겠다고 공약을 내걸고 있다. 가상자산, NFT 사업을 전면에 내걸면 단박에 주가가 뛰니 대기업들은 너나없이 가상자산 사업을 홍보거리로 내놓는다.

2019년 글로벌 블록체인 행사 '코리아블록체인위크(KBW)'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을 찾은 마이크 노보그라츠, 비탈릭 부테린 같은 전문가들은 "한국이 블록체인과 가상자산 산업에서 세계를 주도할 잠재력이 있다"고 진단했다. 세계 최고의 인터넷 인프라와 스마트폰 보급률에, '도토리'라는 가상자산을 사용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분석했다. 아쉽지만 대한민국은 전문가들의 당시 진단을 아직 현실화하지 못하고 있다. 되레 글로벌 시장에 내놓을 마땅한 가상자산 기업 찾기가 어렵다. 그많던 가상자산 기업들이 대부분 쓴잔을 마시고 사업을 접었다. 3년 전 우리 정부가 가상자산을 미운 오리 취급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정부가 발행한 화폐가 아니라 낯설고 증권거래소와 다른 모습이라 어색하지만, 틀렸다고 낙인 찍지 않고 시장에서 같이 성장하도록 돌봐줬으면 2021년 한국 가상자산 산업은 그야말로 글로벌 시장의 화려한 백조가 돼있지 않았을까.

시장은 3년 새 미운 오리의 진가를 알아보고 있다. 그런데 아직 정책은 요지부동이다. 여전히 가상자산 투자는 금융상품 투자가 아니라 그림 투자 같은 개념으로 세금을 매기겠다고 입장을 고수한다. 가상자산거래소는 아직도 벤처기업으로 인정 못받는다.
지금이라도 시장 상황에 맞춰 개선해야 할 정책들이다. 최근 EU 집행위원회는 가상자산 사업 규칙을 담은 법률 MiCA를 채택하면서 "가능한 한 빨리 건전한 규칙을 마련하는 것이 정책 입안자로서 우리의 정책이자 의무"라고 명시했다. 우리 정부가 정책입안자의 의무를 돌아봤으면 한다.

cafe9@fnnews.com 이구순 정보미디어부 블록체인팀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