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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석 칼럼] 왕릉이냐 아파트냐

[노주석 칼럼] 왕릉이냐 아파트냐
왕릉은 죽은 왕의 집이다. 옛 사람들은 살아 생전 사는 양택과 죽어서 거주하는 음택을 뒀다. 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희궁·덕수궁 등 서울 사대문 안 5대 궁이 양택이고, 사대문 밖 40기의 왕릉이 음택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못잖은 가치를 지녔다.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까닭이다.

산 백성의 집이 죽은 왕의 시야를 가린다는 뉴스가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조선의 헌법, 경국대전은 도성에서 10리(약 4㎞) 밖, 100리(40㎞) 안에 왕릉을 두도록 정했다. 백성의 도성 안 거주지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법은 어김없이 지켜졌다. 그런데 살 집이 부족해지면서 백성이 왕의 거주지를 침범하는 변고가 생겼다.

장릉은 모두 세 곳에 있다. 세 명 모두 잠자리가 뒤숭숭한 왕이다. 연대순으로 따지면 영월 장릉(莊陵)과 김포 장릉(章陵), 파주 장릉(長陵)의 순이다. 이번에 구설수에 오른 김포 장릉은 추존 왕 원종의 능이다. 선조의 아들이자,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의 아버지다.

원종은 아버지 선조와 형 광해군과 함께 임진왜란의 참상을 몸소 겪었다. 아들 인조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찧는 절)의 수모를 당했다. 영월 장릉의 주인 단종은 조선에서 가장 불행했던 소년왕이다.

이른바 '왕릉 뷰'가 도마에 올랐다. 내년 6~9월 입주를 목표로 건축 중인 44개 동, 3400여가구의 검단신도시가 김포 장릉 앞을 가리고 들어섰기 때문이다. 장릉의 능침 구역에 올라 정면을 바라보면 탁 트여야 할 전망 대신 공사 중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병풍처럼 둘러쳤다.

개발이익과 문화재 가치가 맞부딪쳤다. 현행법상 문화재 반경 500m 안에 높이 20m 이상의 건물을 지으려면 사전에 문화재청 심의를 받아야 하는데 건설사들은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문화재청도 골조공사가 끝난 뒤에야 파악하는 바람에 문제를 키웠다. 문화재와 아파트 주민의 재산권이 충돌하는 초유의 사태로까지 번졌다. 아파트 철거를 외치는 목소리와 입주권 침해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장릉뿐 아니라 조선왕릉 곳곳이 난리블루스다. 5개의 왕릉을 통칭하는 서오릉 주변이 창릉 신도시로 지정돼 아파트 3만8000가구가 들어선다. 태릉과 강릉 앞 태릉골프장에도 아파트 6800가구가 지어질 예정이다. 왕릉 훼손이 계속되면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이 취소될지도 모른다. 실제로 경고장이 날아왔다.

무슨 수로 이 난국을 수습할까. 건설사의 탐욕과 문화재 당국의 무능이 살 집이 필요한 왕과 백성의 사이를 갈라 놓았다. 의(義)가 끊기기 일보직전이다. 아파트를 짤라서 높이를 맞추라거나, 키 큰 나무를 심어서 시야를 가리라는 훈수는 부질없다.
부분 철거해도 왕릉 훼손은 피하기 어렵다. 뾰족수도 없는 장기 법정공방의 늪에 빠진 게 제일 큰 일이다. 이 지경을 만든 '아파트 공화국'이 한심할 뿐이다. 보호할 가치가 있는 옛것을 제대로 못 지키면 현재의 가치도 잃기 마련인 걸 어찌 모르나.

joo@fnnews.com 노주석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