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은 창업주 김범석 이사회 의장에게 29배 차등의결권을 부여한 뉴욕증권거래소에 지난해 2월 상장했다. 사진은 서울 송파구 쿠팡 본사. 사진=뉴시스
이커머스 쿠팡이 지난해 2월 미국 증시로 직행했던 이유를 두고 증권가 의견은 분분했다. 적자를 면치 못하던 쿠팡 입장에선 실적보다 성장성을 높게 보는 미국 증시에 끌렸을 거란 말이 나왔다. 하지만 결정타는 다름 아닌 차등의결권 때문이었다는 데 이견을 단 사람은 없었다.
한국엔 없고 미국엔 있는 차등의결권은 말 그대로 주식에 차별적인 투표권을 주는 제도다. 공정의 잣대로 보면 용납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성장이 절실한 벤처·스타트업 생리를 고려하면 그렇지 않다. 외부 자본을 유치해 성장하는 기업이 벤처다. 외부 자본이 들어오면 창업주 의결권이 희석되고 경영이 흔들릴 수 있다. 이 난제를 차등의결권제가 보완한다. 쿠팡 상장 당시 뉴욕 증시는 창업자 김범석 이사회 의장에게 보통주보다 의결권이 29배 많은 차등의결권 주식을 인정했다. 10배도 아닌 29배! 쿠팡이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차등의결권은 선진국 증시에선 100년에 이르는 역사를 갖고 있다. 1920년대 미 자동차회사 다지 브러더스가 처음 이를 도입했다. 뉴욕 증시는 투표권 없는 주식을 받은 일반 투자자의 불만이 나타나자 1926년 차등의결권을 제한한다. 공식적으로 금지한 것이 1940년, 그 뒤 되살아난 시기가 1980년대다. 유망 벤처 유치 경쟁이 활발해지면서 차등의결권도 그때부터 날개를 달았다.
차등의결권은 미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인도 등에도 있다. 알리바바가 2014년 홍콩 대신 뉴욕 증시를 택하자 충격받은 홍콩과 싱가포르는 2018년 이를 도입했다. 이런 기류는 동아시아로 최근 급속히 확산 중이다. 테크 기업의 미국행을 막기 위한 방편이다.
우여곡절 끝에 국내도 이 흐름을 탔으나 다시 표류하고 있다. 차등의결권을 명시한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최근 여당 의원들 반대로 입법에 제동이 걸렸다. 소액주주 권익 침해가 거부 이유다. 제2 벤처 붐을 문재인 정권의 자랑으로 내세울 땐 언제고.
jins@fnnews.com 최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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