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단총재김가진사진. 조선시대 평상복 차림의 사진(석탑제공)
[파이낸셜뉴스] 3·1운동은 핍박받는 조선민족의 자연발생적인 운동이었다. 그 전후 지하에서 꿈틀거렸던 조직이 조선 대동단이다. 독립운동 역사에서 3·1운동이 가장 위대한 운동이었다. 동학민중항쟁, 그 후의 임시정부 활동, 만주 무장투쟁, 미국이나 연해주에서의 활동, 국내의 노동운동 농민운동 야학운동 등 모든 독립운동의 정신적 뿌리가 되는 위대한 운동이었다. 3·1운동의 정신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기초가 되었다.
대동단 총재 김가진 저자 장명국 선생은 “우리는 어릴 때부터 독립운동의 주요 활동무대가 중국 상해나 만주, 그리고 미국 같은 해외라고 배웠지만 의문이 남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3·1운동에 참여한 인원은 당시 인구 2000만 명 중 성인 인구의 약 20%에 육박하는데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조직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3·1운동이 일어난 해 국내에서는 조선민족대동단이 결성돼 비밀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고 설명한다.
항일운동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무장투쟁, 외교노선, 실력을 키우는 교육운동, 언론활동, 소작쟁의에 참여하는 방식, 납세거부운동, 노동운동 등이 그것이다. 야학 등 문맹퇴치운동도 독립운동이었다. 학교를 만드는 일, 언론사를 만드는 일도 넓은 의미의 독립운동이었다. 합법·반합법·비합법 등 자신의 처지에 따라 항일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일제 치하의 조선에 사는 사람들의 운명이었다.
김가진도 형편과 처지에 맞는 운동을 했을 것이다. 추측이 아니라 역사의 페이지와 기록이 증명하고 있다.
대동단 총재 김가진 서훈은 개인문제가 아니다. 이미 역사의 문제다. 정부가 나서 유해를 모셔오고, 수훈해 역사 바로 세우기를 진행해야 한다.
늦었지만, 지금 서둘러야 한다. 오는 7월4일이 조선민족대동단 총재 동농 김가진 서거 100주년이 된다.
김가진은 망명지에서 영양실조와 병고에 시달리다 끝내 눈을 감았다. 그는 유교 사회질서에서 태어나 스스로 노력으로 자신을 옭아맸던 굴레를 벗어던지고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은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1919년 고종의 서거 후 군신(君臣) 의리에서 풀려난 김가진은 유교적 세계관을 떨쳐버리고 일제 무단통치에 저항하기 위한 비밀지하조직 조선민족대동단 총재가 되어, 죽는 순간까지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3·1 만세운동 당시 서울 덕수궁 앞의 시위대열 (사진=석탑제공)
■조선대동단은 독립·평화·사회주의를 꿈꾸다
그런데 일부 학계에서 대동단이나 동농 김가진에 대해 복벽주의로 비하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동단이나 동농 김가진이 추구하는 바가 과거 왕조로 돌아가자는 노선을 걸었다는 것이다. 대동단은 1919년 5월 20일 강령을 발표했다. 독립·평화·자유였다. 그리고 같은해 9월에 2차 강령을 발표했다.
독립·평화·사회주의다. 자유를 바탕에 둔 사회주의로 바뀐 것이다.
대동단은 자유와 사회주의까지 주장하는, 지금으로 봐도 상당히 진보적인 조직이었다.
강령만 봐도 대동단은 복벽주의와 너무나 거리가 먼 단체이다. 동농 김가진선생은 그 단체의 총재이자 임정의 고문으로 활약했다. 복벽주의라는 낙인은 사실과 거리가 먼 표피적 비난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3·1독립선언 2주년 기념행사(1921년) 정면단상 왼쪽부터 신규식, 박은식, 김가진, 김병조, 이승만, 장붕, 이동녕, 안창호, 송정도 (사진=석탑제공)
■대동단으로 서훈 받은 분 83명, 단일조직으로 최다
대동단으로 서훈을 받은 분은 현재까지 83명이다. 단일조직으로는 최고 많다. 자료가 발굴됨에 따라 점점 늘고 있다. 하지만 대동단은 아직 교과서에서조차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 또한 김가진을 따라 같이 망명한 아들, 그리고 뒤이어 상하이에 온 며느리도 모두 서훈을 받았다. 총재인 김가진선생만 서훈을 받지 못했다.
왜 대동단과 동농 김가진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없는 것일까?
우선은 대동단의 강령인 독립, 평화, 자유 및 사회주의의 역사적 의미가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의 사회주의가 현재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같다고 볼 수는 없다. 대동단이 1919년에 독립 평화 자유에서 그해 9월에 독립 평화 사회주의로 보다 그 폭을 넓힌 것은 당시의 세계사적 조류와 시대상의 반영이라 볼 수 있다.
1919년 9월의 강령인 사회주의는 자유를 전제로 하는 보다 폭넓은 가치, 특히 경제적 가치를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일부 후세학자들이 대동단과 같은 지하 독립운동 단체의 의미를 낮게 보고 폄하하는 것은 참으로 이들 독립운동가의 명예에 커다란 누를 끼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북로군 정서 고문이었던 김가진 대동단 총재 장례식. 장례식은 임시정부 주석 홍진의 개식사로 시작되어, 대한협회 회장 당시 비서를 지낸 조완구가 그의 생애를 소개하고, 이발과 안창호가 추도사를 올렸다. 김가진의 장례는 사실상 대한민국임시정부장, 즉 국장으로 치러졌다. (사진=석탑제공)
■친일행적으로 지적된 의혹들, 사실과 달라
동농의 친일행적으로 지적된 의혹들은 △이토 히로부미를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 △충청남도 관찰사 시절 의병을 진압하고 의병장 이남규 부자의 순국에 관여했다 △일제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등이다.
먼저 ‘친일시’와 관련해 살펴보자. 1889년 동농이 주일공사로 이토 히로부미와 만나 나눴던 시와 20년 후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낸 시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20년 전에는 평화를 맹세하더니 지금은 병탄을 획책하는가”라고 힐난하는 내용이다.
김가진이 이토 히로부미를 찬양하는 시를 썼다면 바로 다음해 일본잡지 ‘신공론’에 일본의 병탄야욕을 꾸짖는 글을 기고할 리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의병장 이남규 부자 순국 관련설’에 대해서는 승정원일기 등 사료를 통해 전혀 사실이 아님을 밝혀낸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동농은 1906년 4월 15일(이하 음력) 충남관찰사로 임명됐다가 1907년 4월 6일 해임된다. 그런데 이남규 의병장 부자 순국일은 1907년 8월 19일로 무려 4개월 이상 차이가 난다.
오히려 김가진은 재임시절 민종식 의병장을 숨겨준 혐의로 체포(1906년 10월 2일)된 이남규 부자를 풀어줬다. 고종 시절 조선왕조 및 대한제국 법부(法府)로 각 지방재판소에서 보내온 공문서를 제책한 자료인 ‘사법품보(을)’에 따르면 충남재판관이었던 동농이 1906년 12월 3일 ‘이남규를 집으로 돌려보냈다’라고 보고한 내용이 나온다.
‘남작 작위와 은사금 문제’와 관련해 저자는 작위는 일제가 일방적으로 준 것이고, 은사금은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특히 은사금과 관련해 저자는 이것이 오히려 동농이 친일인사가 아님을 확인해주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동농의 자택이었던 종로 청운동 일대 1만평 부지의 백운장은 헐값에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넘어갔다. 집사였던 방치선(方致善)이 동농의 도장을 도용해 전당을 잡힌 것이다. 결국 동농은 셋방살이를 하며 빈한한 생활을 해왔다. 그가 친일인사였다면, 그리고 은사금을 실제 받았더라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이밖에도 저자는 일본 자치군 참모부가 일본 육군대신에게 보낸 기밀문서에 동농을 요주의인물로 보고한 기밀문서 등 새로 발굴된 사료도 공개한다. 저자는 대동단이 지하비밀조직이었다는 점을 주목하며 “대동단 활동에 대한 연구가 일제의 수사기록이나 재판기록에 근거하는 게 많은 데 실제와 다를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농 김가진 무관들과 함께 (사진=석탑제공)
■‘사회주의’ 강령과 복벽주의 공존 불가능
한편 동농이 ‘복벽주의자’라는 논리는 △그가 고종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라는 점 △3.1운동 후 의친왕 이 강의 망명을 추진한 점 등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동농은 ‘친(親)고종 개화파’일 뿐 복벽주의와 거리가 멀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대동단 강령이다. 1919년 9월 나온 2차 강령의 키워드는 ‘독립’ ‘평화’ ‘사회주의’다. 현실적으로 사회주의와 복벽주의는 같이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리고 의친왕 망명 시도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통제와 교통국과의 연계를 통해 이뤄진 것으로 ‘고종이 합법적으로 나라를 이양했다’는 일본의 침략논리를 깨려는 의도일 뿐 복벽주의와 거리가 멀다.
동농은 1919년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망명한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유일한 고문으로 추대된다. 동농은 대동단 조직을 통해 국내에서 2차 만세운동을 추진하고, 며느리 정정화를 국내에 들여보내 독립자금을 모금하고,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고문으로 활동하는 등 왕성한 항일 독립운동을 펼치다 1922년 7월 77세의 일기로 세상을 뜬다.
동농 서거 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각의결정을 통해 그를 정부장(政府葬)으로 모신다. 요즘 식으로 하면 국장(國葬)으로 예우한 셈이다.
저자 장명국 선생은 “이런 삶을 살아온 그에게 ‘친일’ ‘복벽주의’ 낙인을 찍어 서훈을 보류해온 것은 아이러니의 극치”라고 비판한다.
지금 동농의 유해는 상하이 송경령능원에, 아들 김의한은 평양 재북인사묘역에, 며느리 정정화는 대전 현충원에 묻혀있다. 대한민국 100년 현대사의 비극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이들 가족의 이산은 언제 끝날까. 서거 100주년인 올해 그의 유해를 모셔 와야 하는 이유다.
가족의 증언에 의하면 독립문의 현판은 동농이 썻다고 한다. "장강일기" (사진=석탑제공)
■상대성 이론을 다시 생각할 때
1919년 해외에서는 인류의 생각을 크게 변화시킨 4차원의 사고가 등장했다. 바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다. 1919년 5월29일 아프리카 프린시페섬에서 아서 에딩턴의 탐험대는 태양 근처의 별에서 나온 빛이 휘는 것으로 관축,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입증시켜 과학계를 놀라게 했다. 사람들 인식이 뉴턴의 사고에서 아인슈타인 사고로 변화했다.
상대성 이론이 증명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모든 사물을 절대의 관점에서 봤다. 이것 아니면 저것의 2차원의 이분법적 사고, 아니면 3차원의 변증법적 사고가 전부였다. 아이슈타인은 자기 이론이 절대 이론이라고 하지 않고, 상대성이론이라 했다.
다양성을 전제로 하는 사고다. 지금 이 시기 이 다양성이 필요하다는 설명을 저자는 하고 있는 것이다.
만주에서 무장투쟁,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미국에서 외교노선 강화, 모두 필요한 항일운동이다. 이중 국내 지하운동 항일 단체인 대동단이 있다. 대동단이 얼마나 점조직에 의한 결사 단체인지 지금도 그 규모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저자는 본인을 포함 후배 사람들이 게으른 탓이라고 했다.
후학들은 이에 대해 겸손해야 한다고도 했다. 모든 것이 절대적이 아니라고 말한 상대성 이론처럼, 대동단 총재 김가진을 하나의 잣대로 봐서는 안 된다는 강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진 것이다. 단편적인 몇 가지 프레임으로 전체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964425@fnnews.com 김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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