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의회에서 "진주만을 기억하라"던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 23일 오후 6시
日의회 상대로 화상 연설
"日리더십, 큰 역할 할 것...유엔개혁 주장"
日사전에 진주만 공습, 언급 자제 요청
영국, 미국, 캐나다, 이스라엘, 이탈리아 등 실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AP뉴시스
【도쿄=조은효 특파원】 '항전의 상징'이 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각국 의회를 상대로 한 '맞춤형 연설'로 존재감을 높이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23일 오후 6시부터 일본 의회를 상대로 화상 연설을 실시했다. 영국 의회(8일 현지시간)를 필두로, 캐나다, 미국, 독일, 이스라엘, 이탈리아 등에서 연설을 실시했으며,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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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진주만 공격, 언급 말아달라"...유엔개혁 동조 발언
젤렌스키 대통령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를 비롯해 일본 여야 의원 등 50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 생중계 온라인 연설에서 "일본이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러시아에 압력을 가했다"며 일본의 대응에 사의를 표한 뒤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 지속을 요청했다.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국제기관이 작동하지 않았으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도 작동하지 않았다"며 유엔 개혁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리더십이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목표로 유엔 개혁을 주장하고 있는 일본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다.
일본 정부나 의회는 이번 연설을 앞두고, 다소 긴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앞서 지난 16일(현지시간) 미국 의회를 상대로 한 연설에서 "진주만을 기억하라"고 발언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 16분 짜리 연설에서 1941년 일본군의 미국 하와이 진주만 공격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빗대어 언급했다.
23일 오후 일본 도쿄 중의원 회관에서 일본 국회 의원들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화상 연설을 지켜보고 있다.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거나, 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보인다. AP뉴시스
연설 직후, 미 상·하원 의원들이 합심해 우크라이나를 돕자고 목소리를 높인 반면, 미 의회에서 '잊고 싶은 과거사'가 갑자기 툭 튀어나오자 일본 보수·극우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진주만 발언으로 "일본 의회 연설을 취소하라"거나 "젤렌스키와 우크라이나를 더 이상 동정하지 않겠다" 등 혐오감을 드러내는 사람들까지 나왔었다.
이로 인해 이번 연설을 앞두고 일본이 사전에 우크라이나 정부에 "진주만 공격은 언급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요망 사항을 전달했다고 아사히신문이 보도했다.
■독일서는 쓴소리도...아베·푸틴 관계 언급하나 '긴장'
연설 외교가 회를 거듭할 수록, 젤렌스키 대통령의 '입'에 세계의 시선이 모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독일 의회를 상대로 한 연설(17일)에서 독일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사의를 표면서도, 독·러간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이 러시아의 돈줄이 되고 있다는 비판성 발언도 빼놓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본을 상대로도 '불편한 메시지'를 내놓을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되기도 했다.
아베 신조 전 총리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간 '밀월 관계'와 과거 이로 인해 2015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 병합당시 일본이 국제사회의 제재에 소극적으로 나섰던 부분을 짚어내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로서는 '다행스럽게도', 폭탄 발언은 나오지 않았다. 대체로 "일본 국민들의 정서에 맞춰, '마일드' 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연설의 목적 자체가 국제사회의 지원 확대를 극대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어, 최대한 맞춤형 연설을 하고 있는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6일(현지시간) 화상을 통해 미국 의회 연설을 하고 있다. AP뉴시스
막사 테크놀로지가 제공한 위성사진에 2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이르핀의 건물들이 러시아의 공격으로 불에 타고 있다. AP뉴시스
■"러, 사린가스 공격 준비 보고"
지난 8일 영국 의회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인들의 항전 의지를 고취시켰던 '처칠의 연설'을 인용,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숲에서, 들판에서, 해변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싸울 것"이라고 말해 기립 박수를 받았다. 당시 BBC는 젤렌스키의 9분 남짓한 연설이 이어지는 동안 일부 의원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거나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경청했다고 보도했다.
또 20일 이스라엘 의회를 향한 연설에서는 푸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유태인 홀로코스트(대학살)에 빗대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한편,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일본 의회를 상대로 한 연설에서 "러시아가 사린 등의 화학무기를 사용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있다"며 러시아의 대량 살상 무기 사용 가능성에 강한 우려를 나타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어서 스웨덴, 나토(NATO, 북대서양 조약기구)정상회의에서도 연설을 이어갈 예정이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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