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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영 칼럼] 안보 포퓰리즘에 경보음 울렸다

[구본영 칼럼] 안보 포퓰리즘에 경보음 울렸다
우크라이나 평원은 해바라기 산지다. 소피아 로렌이 열연했던 고전 영화 '해바라기'의 로케 현장이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포연이 자욱해진 지금 그 영화 속 참상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19일 우크라이나인뿐 아니라 침략한 러시아군도 최대 1만5000명의 전사자를 낸 것으로 추정했다.

러시아군 내부에서도 불편한 진실이 노출됐다. 사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건 논외로 치자. 문제는 희생자 대부분이 남부 다게스탄이나 시베리아의 부랴티야공화국 등 가난한 지역 출신이란 사실이다. 얼마 전 러시아 독립매체 메디아조나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 전사자는 없었다"며 이를 확인했다.

'전사자의 양극화'는 러시아판 모병제의 슬픈 부산물이다. 현재 러시아는 모병제로 전환 중이다. 옛 소련이 해체된 이후 천연가스와 석유 수출로 경제사정이 나아진 덕분이다. 아직 복무기간 1년짜리 징병제도 유지하고는 있다. 하지만 이들은 후방에서 보조업무만 수행하고 실전엔 돈을 받는 자원입대자들이 투입된다. 비러시아계나 변방 출신 '흙수저' 병사들만 죽어가고 있는 배경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병사 월급 200만원'을 약속했다. 하지만 최근 국회 국방위에 보고된 '2023∼2025년 병사 봉급 인상계획'에 따르면 내년 병장 월급이 100만원으로 책정됐다. 올해 67만여원에서 32만여원 오르는 셈이다. 그래 봤자 취임 즉시 이병부터 월 200만원을 보장하겠다던 약속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액수다.

결과적으로 윤 대통령은 대선 공약을 지키지 못하게 됐다. 닳고 닳은 기성 정치인들과 달리 공약 이행에 대한 그의 강박관념은 충분히 느껴진다. 그러니 온갖 우려와 반대를 무릅쓰고 청와대를 개방하고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옮겼을 게 아닌가.

다만 징병제 국가에서 사병 월급을 200만원씩 주는 나라는 한 곳도 없다. 윤 대통령 임기 내인 2025년까지 달성 시점을 미루더라도 이를 이행하려면 약 10조원의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 징병제하에서도 이미 국방비 중 70%를 인건비로 지출하는 한국이다. 애초 현재 부사관 초임 월급보다 더 높은 목표 자체가 비현실적이었다.

그렇다면 윤 대통령이 어차피 실현 불가능한 공약이었음을 솔직히 인정하는 게 도리다. 그런 다음에 재정여건을 감안해 이행 속도를 조절하는 게 옳다는 얘기다. 그래서 국정의 시행착오를 예방한다면 궁극적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는 길일 듯싶다.

사실 사병 월급 200만원 공약의 판권이 딱히 윤 대통령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이를 선창했다. 이 후보가 2027년까지 이를 달성하겠다고 치고나가자 당시 윤 후보가 빼든 맞불 카드였다. 그래서 '이대남' 등의 표를 얻는 데 도움이 됐을 순 있으나, 인기영합 경쟁의 산물이었음을 부인하긴 어렵다.


더욱이 대선에서 여야 후보 여럿이 모병제 도입도 약속했다. 정의당 심상정 후보뿐 아니라 이재명 후보가 '선택적 모병제', 안철수 후보(국민의당)가 '준모병제'를 공약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극빈층 병사들만 모병에 응해 전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보라. 우리처럼 분단상황에서 섣부른 모병제 공약 등으로 '안보 포퓰리즘' 경쟁을 촉발해선 곤란하다는 생각이 든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