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약초의 치험례를 바탕으로 이것을 이야기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야채박록과 본초강목에 그려진 교맥(蕎麥, 메밀)
옛날 여름철이면 곽란(癨亂, 식중독)으로 인해 배앓이는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별다른 냉장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음식은 쉽게 쉬기 일쑤였고, 아침에 해 놓은 밥이나 옥수수는 하루만 돼도 쉰내가 가득했다. 그래도 먹을 것이 궁한 시절이라 한번 냄새를 맡아보고는 견딜만하면 그냥 먹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눈으로 봐서 멀쩡하게 보이는 음식을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한 마을에는 먼 어촌마을에서 얻은 조개들을 구워먹고 배탈이 난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몇일 간 구토와 설사를 심하게 하더니 좀 잠잠해지는 듯했으나 이어서 배앓이를 하기 시작했다. 배가 갑자기 사르르 아프다가 곧바로 설사를 했다. 부랴부랴 변소를 찾았지만 설사량은 많지도 않고 마치 닭통처럼 콧물같은 점액변만 찔끔거리기도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아랫배의 통증과 설사기가 있어서 밭일이나 논일은 물론이고 멀리 출타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내는 마을의 의원을 찾았다. 소화를 돕는 평위산(平胃散)도 써보고, 급만성 장염을 치료하는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도 처방받았다. 심지어 기운을 올리는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도 써 보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진정이 되는가 싶더니 증상은 완벽하게 잡히지 않고 반복되었다.
사내는 거의 두 달 가까이 만성적인 장염을 앓게 되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급박하게 변소를 찾을까봐 식사양도 줄었고 그래서 몸도 점차 야위였다. 두달만에 거의 돼지고기 10근 정도에 해당하는 정도의 체중이 줄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만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스님이 이 사내의 집에 시주를 왔다. “나무아미타불~” 매년 이맘때면 찾아오는 스님에게 사내의 어머니는 그때마다 조금의 곡물을 시주했기에 스님은 이 집을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그날도 사내의 어머니는 곳간에서 보리 한 되와 쌀 반 되, 메밀 한 되를 스님의 바랑에 넣어주었다. 스님은 “불자님 이렇게 많은 시주는 필요치 않습니다.”라고 사양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스님 저의 아들놈이 상한 조개를 먹고 배앓이를 하게 된 지가 벌써 2달이 지나 밥을 잘 먹지 못해 이렇게 곡물이 좀 남았습니다. 아들의 건강을 위해 스님께서 부처님에 빌어 주셨으면 합니다.”하면서 아들의 증상을 전했다. 크게 기대한 바 없는 일종의 푸념이었다.
스님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바랑에서 메밀 주머니를 다시 꺼냈다. “그럼 이 메밀을 볶아서 가루 낸 후 다른 것은 넣지 말고 메밀가루만을 죽을 쒀 먹여 보시지요. 아마도 장에 열독(熱毒, 염증)이 쌓여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메밀은 기를 아래로 내리고 오장의 더러운 찌꺼기를 없애고 장을 너그럽게 합니다. 그래서 찔끔거리는 설사나 복통이 있을 때 효과가 좋은데, 메밀만을 가루내서 밥으로 먹으면 몇차례 설사가 나면서 이내 나을 것입니다. 불가에서는 스님들은 독버섯을 먹고 탈이 나면 장을 해독(解毒)하기 위해서 몇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메밀죽만으로 공양을 드리곤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부처님의 보살핌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라고 전하며 다시 길을 떠났다.
어머니는 스님의 말대로 메밀을 솥뚜껑에 노르스름하게 볶아내서 가루내서 그것만으로 죽을 쑤었다. 그 죽을 아들에게 먹이자 처음에는 설사처럼 나오는 증상이 심해지고 방귀를 자주 뀌었다. 그러나 항문이 빠져나갈 듯한 후중감(後重感)이 없어졌고 기분 나쁘게 사르르 아팠던 복통은 점차 진정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메밀가루 죽을 하루 이틀 먹이자 복통, 설사도 줄면서 이제는 식욕도 생겼다. 이렇게 일주일 정도 지나자 복통, 설사가 사라졌다. 식욕도 돌아와 맨밥을 먹을 수도 있었고, 기력과 체중도 정상적으로 회복이 되었다.
사내의 배앓이가 스님이 알려준 방법을 통해서 나았다고 소문이 났다. 마을 사람들이 그 방법을 궁금해하면 사내의 어머니는 “별거 아니요!”라고 답할 뿐이었다. 그런데 누구보다 마을의 의원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미 자신도 처방에도 별다른 차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의원은 필시 스님의 대단한 비전(祕傳)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마을의 의원은 엽전 한 꾸러미를 챙겨서 청년의 어머니를 찾았다. “부인, 스님의 비방(祕方)을 제가 사겠소. 도대체 어떤 비법이요.”라고 나지막하게 물었다. 청년의 어머니는 엽전 꾸러미를 보고선 어이가 없었다. 메밀은 단지 하찮은 곡물에 지나지 않았고, 아들의 병은 메밀이 아니라 부처님의 자혜로 나은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돈은 필요없소, 그냥 메밀만 먹였소.”라고 하면서 스님이 전한 그대로 알려주었다. “진정 메밀뿐이었소?” 의원은 허탈해했다.
사실 익히 의서를 읽어 메밀을 일컫는 교맥(蕎麥)의 효능을 알고 있는 터이지만, 의원은 메밀만을 약으로 사용해 본 적도 없었고, 메밀이 들어간 처방은 더더욱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당대 명 처방들조차 효과를 보지 못했는데, 메밀 한가지 만으로 치료를 했다고 하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놀랐다.
의원은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엽전으로 비방을 산 것이 아니라 지혜를 얻었구나.’ 그날 이후 의원은 청년과 비슷한 증상으로 내원한 환자에게는 다른 처방을 하지 않고 집에서 메밀로 죽을 쒀 먹으라고 일렀다.
심지어 약방 앞에 메밀의 효능을 설명하는 방(榜)을 붙었다. ‘메밀은 맛이 달고 성질이 차며 독이 없다. 장위를 튼튼하게 하고 기력을 보익하며 오장의 더러운 찌꺼기를 없애고 정신을 좋게 한다. 장을 해독해서 장염설사에도 좋고, 변비에도 좋다. 또한 혈관을 튼튼하게 해서 중풍을 예방하고 몸의 피부나 점막에 난 종기나 염증을 사그라뜨린다. 메밀가루 죽이나 메밀밥도 좋고, 단지 집에서 메밀을 약간 볶아서 차로 끓여서 먹어도 좋다. 다만 메밀의 성질이 차기 때문에 속이 너무 냉하고 소화가 잘 안 되는 체질에게는 맞지 않고 열이 많은 체질에게 좋다’라는 내용이었다.
동네 주막의 메밀면도 불티나게 팔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주막의 메밀면은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의원에 약방에 붙어 있는 방의 내용에 의구심을 나타냈다. 의원에게는 제자가 한 명 있었는데, 제자는 의원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스승님의 말씀대로 동네 사람들이 비싼 돈을 내고 주막에서 메밀면을 먹었고 나서는, 장 해독은커녕 다들 그냥 배만 부르다고 푸념하고 있습니다.”하면서 걱정을 전했다.
의원은 제자와 함께 주막에 가서 메밀면을 주문해서 먹어 보았다. 그러고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 주막에서는 메밀가루에 밀가루나 다른 곡물가루를 섞어 메밀면을 만들기 때문인 것 같네. 또한 메밀은 곡물 중 가장 차가운 기운인데 여기에 기운이 뜨거운 밀면을 섞고 게다가 개자(芥子, 겨자) 가루를 함께 내어주니 주막에서 파는 메밀면의 약성을 잃었다고 해야 할 것이네.”
의원은 이어서 “이 오이냉채도 마찬가지지. 오이는 서늘한 기운으로 여름철 더위를 식히기 위해서 냉채(冷菜)로 만들어 먹는데, 이처럼 뜨거운 약성의 고추를 함께 썰어 넣고 있으니, 역시 냉채라는 이름이 무색해졌네. 그러나 사실 주막의 음식은 어떤 체질이나 증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와서 먹을지 모르는 터라 어찌 보면 이렇게 음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 부작용 없는 무난한 조리법일 수 있을 것이네.”하며 아쉬워 했다.
제자는 의원에게 “스승님, 식품에도 사기오미(四氣五味)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의원은 제자에게 “모든 식품에는 약과 마찬가지로 사기오미가 있네. 사기(四氣)는 한열온량(寒熱溫涼)으로 차고, 뜨겁고, 따뜻하고, 서늘함이며, 오미(五味)는 산고감신함(酸苦甘辛鹹)으로 시고, 쓰고, 달고, 맵고, 짠맛이지. 따라서 식품 또한 역시 서로 간의 궁합이 잘 맞아야 하는 법인 것이야. 그래서 한성(寒性)인 메밀에 열성(熱性)의 밀가루나 매운맛의 개자를 넣으면 한열(寒熱)과 오미(五味)가 서로 뒤엉켜 기운이 중화되어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네.”라고 했다.
의원과 제자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엿듣고 있던 주막의 주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 주모는 메밀만으로 면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고, 열이 많은 사람은 개자를 빼고 먹어야 한다거나 얼음물에 말아서 먹도록 하고, 반대로 냉체질의 경우 개자를 많이 넣어 먹거나 고추장에 비벼서 매콤하게 먹으면 부작용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줬다. 이로써 의원들뿐만 아니라 주막이나 일반 가정에서조차 식약동원을 실천하게 되었다.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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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초강목> 按楊起 簡便方云, 肚腹微微作痛, 出卽瀉, 瀉亦不多, 日夜數行者. 用蕎麥麪一味作飯, 連食三四次卽愈. 予壯年患此兩月, 瘦怯尤甚. 用消食化氣藥俱不效, 一僧授此而愈, 轉用皆效, 此可征其煉積滯之功矣.(양기의 간편방에 이르기를 ‘배가 살짝살짝 아프다가 곧 설사가 나면서 설사의 양도 많지 않고 밤낮으로 자주 나오는 증상에는 메밀면 한 가지만으로 밥을 지어 서너 차례 계속 먹으면 곧바로 낫는다’라고 하였다. 내가 젊었을 때 두 달간 이 병을 앓아서 몸이 야위고 약해지는 게 더욱 심해졌다.
음식을 소화시키고 기를 돌리는 약을 써 보아도 모두 효과가 나지 않았다. 어떤 승려가 이 방법을 전해주어 낫게 되었고 다른 이들에게 전하여 모두가 효과를 보았으니 이는 바로 쌓이고 막힌 것을 쳐 내리는 효과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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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초정화> 蕎麥. 主實腸胃, 益氣力, 續精神, 能鍊五臟滓穢.(메밀은 장위를 실하게 해주고 기력을 더해주며 정신을 이어주고 오장의 더러운 찌꺼기를 제거한다.)
pompom@fnnews.com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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