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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A씨는 지난 6월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게재한 '일당 10만원 아르바이트' 인터넷 광고를 접했다. 타인 명의로 개통된 유심 칩을 중고 휴대전화에 넣고 구글 메시지 애플리케이션의 기기 페어링 기능을 활성화한 뒤 휴대전화가 꺼지지 않도록 관리해 주면 된다는 내용이었다. 조직원의 지시에 따라 모 빌딩으로 이동한 A씨는 화장실 쓰레기통 밑에 있던 유심 칩을 수거한 뒤, 조직원이 송금해 준 돈으로 중고 휴대전화 4대를 구입했다. A씨는 수거한 유심을 휴대전화에 넣어 기기 페어링 기능을 활성화해 조직원들이 해외에서 건 전화를 국내 '010' 전화번호인 것처럼 변경되도록 도왔다. '중계기 관리책'이 된 A씨는 지난 11일 서울북부지법에서 전기통신사업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보이스피싱 범죄 수법이 갈수록 지능화되고 있다. 최근엔 범행에 사용되는 불법 중계기 대신 중고 스마트폰을 이용하면서 범죄가 급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보이스피싱 범죄자들은 외부에서 인터넷 전화로 걸때 상대방에게 뜨는 '070' 번호를 '010'번호로 뜨게 하기 위해 불법 중계기를 이용한다. 하지만 최근엔 값비싼 중계기를 사지 않고도 중고폰의 기기 연동 기능을 이용해 번호를 둔갑시켜 전화를 걸고 있다.
28일 경찰청에 따르면 올해 1~7월 발생한 국내 전화 금융 사기 건수는 1만4197건으로 피해액은 3613억원이다. 지난 7월 보이스피싱 피해 발생 건수는 전월(1694건) 대비 6% 증가한 1796건에 달했고, 피해액은 545억원으로 한 달 전보다 22% 증가했다.
사기범들은 한동안 해외 또는 070 인터넷 전화번호를 국내 전화번호로 표시하기 위해 발신번호가 '010'으로 시작하도록 변경하는 장치인 'VolP 게이트웨이(심박스)' 등의 불법 중계기를 주로 사용했다. 이로 인해 지난 2020년 불법 중계기 밀수입 적발 건수는 전년 대비 10배 이상 급증한 바 있다.
하지만 밀수입 비중은 몇 년 새 급감했다. 인천본부세관에 따르면 적발된 보이스피싱 불법 중계기 밀수입 건수는 2020년 95건에 육박했지만 지난해에는 23건, 올해 상반기에는 4건에 그쳤다.
이는 최근 변화한 전화 금융 사기 범행 추세가 반영된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심박스 등을 직접 이용하는 대신 스마트폰을 '자체 불법 중계기'로 변형해 악용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어서다.
실제 스마트폰 내부에 탑재된 기기 페어링, 다른 기기에서 전화·문자하기(CMC) 등 자체 기능만으로 심박스 없이 외부 번호를 '010' 전화번호로 조작할 수 있다. 특히 CMC는 동일한 계정에 로그인 된 경우 다른 기기에서도 전화나 문자 원거리 수신·발신이 가능하도록 한 기능이다. 이를 악용할 경우 해외에 있는 태블릿PC에서 전화를 걸면 같은 계정에 연결된 국내 스마트폰을 거쳐 '010' 번호로 바꿀 수 있다.
경기남부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는 지난달 11일 해외 전화번호 앞자리를 '010'으로 바꿔주는 장비를 둔 불법 통신 중계소의 운영 일당 15명을 검거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스마트폰의 CMC 기능을 통해 해외 거점 PC와 스마트폰 여러 대를 연동한 뒤 번호를 변형, 보이스피싱 범행에 이용했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 전화번호 변형 수법까지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 경찰의 설명이다. 경찰 관계자는 "최근 몇 년 새 불법 중계기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면서 검거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서 새로운 수법이 등장한 것"이라며 "수백만 원 상당의 중계기는 소위 '뜯기면' 그만이지만 유심칩과 휴대전화는 비교적 싼값에 제약 없이 구매할 수 있다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 CMC 기능 활용 시 010 번호로 미끼 문자를 보낼 수 있어서 범행 악용 사례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nodelay@fnnews.com 박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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