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국민의힘 반도체산업경쟁력강화특별위원장인 무소속의 양향자 의원이 지난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파이낸셜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주요 현안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진=서동일 기자
양향자 의원의 첫인상은 묵직했다. 표정엔 초선답지 않은 여유로움이 묻어있었다. 인터뷰를 하다보니 여상 졸업후 삼성전자 입사, 삼성그룹 역사상 첫 여성출신 임원 등 '화려한' 꼬리표가 괜히 따라붙는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드러운 외모에서 뿜어져나오는 내공은 견고하고 당당했다. 기자가 지난 25일 여의도 국회의원 회관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반도체 성공신화의 주역'이라고 첫 마디의 운을 떼자 엄지와 검지를 착 붙여보이며 "반도체 관련 30년 일하고 공부했는데 아직 요만큼 밖에 모른다"는 겸손함이 돌아와 좀 뻘쭘해졌다. 우선 반도체를 접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운명인 듯 싶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당시 성향조사를 했는데 자연계 99%이상이 판정됐다고 했다.
꿈의 첫 직장 삼성전자 반도체회사
어릴적 꿈은 수학이나 물리를 가르치는 대학교수였지만 어려운 집안형편과 지병으로 앓아누워계신 아버님을 대신해 어떻게든 취업전선에 뛰어들려고 고민하다 광주여상에 진학했다. 아버지는 고1때 돌아가시고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고3때 담임선생이 진로를 권유해주셨는데 여상 특성상 많이 가는 은행이나 기업이 아닌, 바로 이름도 생소한 '삼성전자 반도체통신주식회사'였다.
삼성전자와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다. 1985년 11월 삼성전자 기흥연구소 반도체 메모리설계실 연구보조원으로 입사했다. 말이 직원이었지, 주산, 타자에 복사하고 커피타는 잡일이 주 업무였다. 호칭도 '미스 양'이었다. 당시 기업문화가 남성 위주에다 학력차별이 심했던 만큼 여상을 졸업한 젊은 양향자에게는 모든 게 낯설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훗날 반도체 전문가로 키운 게 바로 조직의 편견과 차별이었다. 이 때 연구원들이 "미스 양"에서 "양향자씨"로 호칭을 바꿔 부르게 된 일화가 있다. 당시 반도체는 한국에겐 미개척 분야로 생소한 개념이었다. 일본이 단연 글로벌 최고 수준이었다. 당연히 사내 회의자료는 일본어투성이였다.
무소속의 양향자 의원이 지난 25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가진 파이낸셜뉴스와 인터뷰에서 한국의 반도체 미래 경쟁력 강화 방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서동일 기자
일본어 열정으로 미스양에서 양향자씨로 호칭 변경
양 의원은 "회의 때마다 놓는 자료가 다 일본 페이퍼인데 연구원들이 관심이 없더라"라고 기억을 떠올렸다. 여고 시절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잠시 배웠지만 반도체 논문을 번역하기엔 턱도 없었다. 서투르지만 사전을 찾아 일일이 우리말로 번역한 자료를 놨더니 그때부터 "양향자씨"로 호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고졸사원 등 편견과 차별로 번번이 퇴짜를 맞는 우여곡절끝에 사내 강의를 신청, 3개월만에 일본어 3급 자격증을 가장 먼저 따는 열정도 보였다.
당시 메모리설계팀장이 바로 양 의원 멘토였던 임형규 책임연구원이다. 20대 초반 신입직원이 일본어 번역을 어느정도 하자 임 팀장이 팀회의 참석을 허용했다. 임 연구원은 이후 삼성전자 사장과 SKT 부회장을 역임했다. 고졸 새내기 직원인 양향자를 14년간 성장시켜 장래 임원으로 키운 주역이다. 양 의원은 "임형규 회장님이 저의 첫 보스였다"고 했다. 주경야독의 열정으로 일본어 자격증을 딴 22세의 양향자는 실력을 인정받아 1988년 일본의 반도체 권위자인 하마다 시게타카 박사 방한 때 무려 1주일이나 통역과 가이드를 맡기도 했다.
정치인 양향자 화려한 입성
정치인 양향자는 지난 2016년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영입인재 케이스로 발탁됐다. 당시 입당 소감을 보면 기업가 양향자의 담대한 도전적 인생이 고스란히 베어 있다. 양 의원은 "학벌의 유리천장, 여성의 유리천장, 출신의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 모든 걸 다 바쳐 노력했지만, 청년들에게 '나처럼 노력하면 된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며 "오늘 열심히 살면 정당한 대가와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스펙은 결론이 아니라 자부심이 돼야 한다"고 했다.
고비때마다 고졸, 여성이라는 한계와 높은 진입장벽에 굴하지 않고, 오로지 노력과 열정, 끈기로 버텨온 만큼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면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도 일에 파묻혀 지내다보니, 1991년 첫 딸을 낳기 전날까지 일을 계속했다고 한다. 출산 이후에도 제대로 산후조리를 못한 채 100일도 안된 아이를 안고 회사에 가기도 했다. 얼마나 일을 했던지 태교가 곧 컴퓨터 키보드 소리였다고 한다. 아이가 울고 보채더라도 키보드 소리가 나면 어느새 조용해졌다는 것이다. 기자는 순간 웃어야 할 지 다소 난감했지만, 양 의원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무소속의 양향자 의원이 지난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파이낸셜뉴스와 인터뷰를 통해 과거 삼성전자 첫 입사시절 당시를 떠올리며 얘기하고 있다. 사진=서동일 기자
미래인재 육성과 K-칩스법 통과 주력
양 의원은 요즘 반도체 미래 인재 육성과 반도체특별법 국회 통과에 꽃혀 있다. 양 의원은 정치권의 낮은 관심을 아쉬워했다. 그는 "반도체만큼 정직한 게 없고, 웨이퍼만큼 정직한 게 없다"라며 "삼성이 글로벌 전쟁터에서 30년간 1등하고 있는 메모리 성공신화를 배우려는 정치인이 거의 없더라"로 꼬집었다. 양 의원은 반도체를 기반으로 하는 정보혁명은 15년마다 사이클이 있다고 진단했다. 1977년 PC→1992년 디지털혁명→2007년 모바일혁명→2022년 AI(인공지능), 자율주행 등 4차산업혁명 사이클이 있다는 얘기다. 양 의원은 "팝콘 터지듯 플랫폼 생태계의 팽창속도가 엄청 빠른데 그 핵심이 반도체 기술이어서 미국과 중국 최강대국들이 반도체 패권경쟁이 일어난 것"이라고 봤다.
양 의원은 반도체 미래 인재 육성을 위한 마스터플랜의 부재를 비판했다. 양 의원은 "미국의 마이크론이 삼성전자를 (기술력 등에서) 쫒고 있는데 굉장히 위험하다. 이유는 인재가 없어서다"고 힘주어 말했다. 무엇보다 교육부가 반도체 관련 인재를 육성할 수 있는 종합청사진을 설계하고 구체적인 실행 로드맵을 조속히 세워야 한다고 조언한다. 양 의원은 "세계 최고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대만의 TSMC가 저렇게 클 수 있었던 건 창업주인 모리스창 회장이 미국 기업에서 일하면서 비메모리반도체 시장이 더 커질 것이란 걸 미리 알았던 것"이라고 했다. 이어 "대만은 지금 이공계를 완전히 밀고 있다. 모든 대학이 이공계다. 기술적 측면도 중요하지만 이런 통찰력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반도체는 모순극복의 역사"
특히 미·중 반도체 패권 다툼이 가속화되는 지금이 대한민국에겐 위기이자 기회라고 봤다. 그는 "미국이 한국과 대만과 반도체 동맹을 맺어 전세계시장 장악에 나섰는데 대만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불안한데 이게 삼성전자에게 기회를 준다고 본다"라고 전망했다. 최근 미국 주도의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인 '칩4'의 한국 가입여부와 관련해선 "미국이 중국 제재할 때 한국은 기회가 될 수 있어. 그래서 칩4 당연히 할 수 밖에 없는 거고. 그래도 중국시장과 전략적으로 동반자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양 의원은 반도체를 '모순 극복의 역사'로 규정한다. 집적도는 키워야 하는데 면적은 줄여야 하고, 속도는 빨라야 하는데 전력소모를 최소화해야 하고, 성능은 엄청 좋아야 하는데 가격은 싸야한다는 것이다. 이래야 '초격차'가 가능하다는 게 양 의원의 지론이다. ‘초격차'(超隔差)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기술을 함축하는 단어다. 기술 격차에 ‘초(超)’라는 접두어를 붙인 것으로 지난 2009년부터 삼성내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양 의원은 "격차는 기술자의 품격에서 나온다. 기술자의 품격은 기술자의 철학에서 비롯된다"며 "초격차는 익숙함과의 결별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삼성만의 높은 기술력이 수십년간 메모리분야 세계 1위를 굳건하게 유지시켜 주고 있지만, 기술·인재·투자를 소홀히 한다면 언제든지 따라 잡힐 수 있는 게 글로벌 반도체시장이라는 얘기다.
국민의힘 반도체산업경쟁력강화특별위원장인 무소속의 양향자 의원이 지난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파이낸셜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서동일 기자
여야 의원 30명 초당적 공동서명 발의
국민의힘 반도체특별위원장인 양 의원은 이달 초 미국과 유럽연합, 일본 등이 반도체 지원법에 대응하는 한국형 K-칩스법을 발의했다. 반도체 특위가 출범한 지 불과 두달만의 성과다. K-칩스법은 '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특별법 개정안'과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으로 구성됐다. 법안에는 여야 의원 30명이 서명했다. 골자는 신속한 전략산업 특화단지 조성, 예비타당성 조사면제 범위 확대, 인·허가 처리기간 단축, 세액공제 상향 등 다양한 행·재정적 지원내용이 폭넓게 담겼다.
윤석열 정부가 반도체를 경제외교, 안보외교로 설정한 것에 대해 후한 점수를 줬다. 그는 "7년전 정치에 입문할 때부터 '반도체가 외교고 안보다'라고 외쳤는데 윤석열 대통령도 똑 같이 강조하더라"라고 했다. 내친김에 국회에 아예 '미래첨단산업육성을 위한 국회 상설 특위 설치'를 촉구하고 있다. 양 의원은 "반도체특위 역할은 반도체사업 강화를 위한 국가 대개조산업"이라며 "교육의 판을 새로 쨔야하고, 기술강국을 향한 인재개발의 로드맵도 세우는 등 국가 시스템을 바꾸는 거다"라고 말했다.
"반도체는 정파, 지역, 계층 초월해야"
양 의원은 인터뷰 내내 교육 개혁과 인재 육성, 국가대개조를 통한 반도체 기술력 제고 등을 강조했다. 간간이 도표를 곁들여 가며 지난 수십년간의 반도체 글로벌시장 판도 변화와 추이를 설명하면서 K반도체가 가야할 미래 좌표를 그려내기도 했다. 인터뷰 도중 휴대폰으로 연신 전화가 걸려오고, 모 단체장은 지역내 반도체 산업 육성과 관련한 민원을 들고 깜짝방문하기도 했다. 대학과 정부부처에서 특강 요청도 쇄도하고 있다.
그에게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는 늘 반도체로 귀결됐다. 그는 끝으로 "제가 반도체 특위하면서 여론의 관심은 반도체가 아니라, 민주당 출신이 어떻게 국민의힘 특위를 맡았느냐 하는데 있었다"며 "반도체는 초월이다. 정파를 초월하고 지역을 초월하고 계층을 초월해야 한다"고 쓴소리를 잊지 않았다.
정리=전민경 기자
haeneni@fnnews.com 정인홍 전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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