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25년 전 오늘, 영국 윌리엄 왕세손과 해리 왕자의 어머니이자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들 찰스 왕세자의 전부인인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유명을 달리했다. 31일(이하 현지시간)은 다이애나비의 25주기다. 다이애나비는 1981년 7월 29일 찰스 왕세자와 결혼했다. 슬하에 윌리엄과 해리 두 아들을 두었으나, 순탄하지 못한 왕실 생활과 불화로 1992년부터 별거에 들어간 후 1996년 이혼했다. 이혼 후에도 자신이 가진 대중적 영향력을 통해 봉사와 자선활동에 헌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이혼 다음 해인 1997년 8월 31일 프랑스 파리 알마 터널에서 파파라치를 피해 고속 질주하던 중 차가 터널 안 중앙분리대를 들이받는 사고로 36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많은 여성들의 워너비로 전세계적인 애도를 받고 있는 다이애나비의 짧은 일생 36년을 되돌아본다.
故 다이애나비가 생전 거주하던 켄싱턴 궁 정문 앞에 사망 25주기를 추모하는 사진과 꽃다발이 가득 놓여있다. /AP연합뉴스
불행했던 어린시절
故 다이애나비의 어린시절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다이애나는 1961년 7월 1일 영국 샌드링엄에서 훗날 스펜서 백작 7세가 되는 올소프 자작 에드워드 존 스펜서와 퍼모이 남작 4세의 딸 프랜시스 사이에서 셋째 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시절은 대체로 불행했다. 다이애나의 부모님은 후계자가 될 아들 출산, 성격 차이 등으로 매일 다투었고 그녀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부모는 이혼했다. 다이애나는 9살 때까지 학교에 다니지 않고 자택에서 가정교사로부터 홈스쿨링을 했다. 이후 노퍽에 있는 킹스 린 실 필드 학교, 리들워스 홀, 웨스트 히스 여자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돌보고 봉사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자신감이 없고 소극적인 성격으로 성장했다.
찰스와의 만남과 약혼
1980년 유치원에서 일하던 당시의 다이애나 스펜서 /AP 뉴시스
1980년 11월 런던 얼스 코트에 있는 아파트서 언론과 마주친 다이애나 스펜서 /AP 뉴시스
공식적으로 약혼을 발표한 1981년 2월 24일의 예비 신부 다이애나. /AP연합뉴스
다이애나가 찰스 왕세자를 처음 본 것은 그가 언니 사라의 남자친구였던 17살 때였다. 언니 사라와 8개월간 만남을 이어가던 찰스 왕세자는 사라와 멀어지면서 자연스레 다이애나의 눈에서도 사라졌다. 다이애나는 가까스로 부모의 허락을 받아 1979년 런던으로 갔다. 이곳에서 다이애나는 친구들과 함께 살며 가사도우미, 보모, 유치원 보조교사 등의 일을 하며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시기를 보냈다. 1980년 찰스 왕세자를 다시 만났다.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의 자상함과 아름다움에 호감을 가지며 교제를 시작했다. 다이애나는 1981년 2월 6일 찰스 왕세자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와 12번 만난 후 청혼했다고 한다. 다이애나는 2월 24일 약혼을 공식 발표했다.
1981년 7월 29일 세기의 결혼식
1981년 7월 29일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의 결혼식에 참석한 유럽 왕실 가족. /AFP 연합뉴스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가 1981년 6월 29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마친 후 런던 버킹엄 궁전 발코니에 서 있다. /로이터 뉴스1
결혼식을 마친후 버킹엄궁 발코니에서 입맞춤을 하고 있는 찰스와 다이애나. /로이터 뉴스1
찰스 왕세자와의 결혼을 위해 세인트폴 대성당에 도착한 신부 다이애나 /로이터 뉴스1
1981년 7월 29일 전세계에 생방송되는 가운데 다이애나는 런던의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세기의 결혼식'을 치렀다. 수천 개의 진주가 달린 아이보리색 웨딩드레스와 7m 길이의 트레인(머리에 쓰는 베일)으로 치장한 다이애나는 젊고 청순하고 아름다웠다. 성당 앞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도, 그녀의 결혼식을 생중계로 지켜보던 전 세계 7억의 사람들도 모두 찰스 왕세자 부부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것을 기대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2004년 NBC가 방영한 테이프에서 다이애나비는 “결혼식날이야말로 생애 최악의 날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순탄하지 못한 왕실 생활과 파경
1985년 11월 7일자 오스트레일리아 국빈 만찬에 참석한 다이애나 왕세자비. /AP 뉴시스
1995년 5월 7일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서 열린 국빈 추도식에 참석한 다이애나와 아들 해리 왕자. /로이터 뉴스1
1987년 8월 4일 다이애나(왼쪽)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런던의 클라란스 하우스에서 미소 짓고 있다. /AP 뉴시스
1993년 7월 6일 써리주 캠벌리에 있는 엘름허스트 발레 학교를 방문한 다이애나비 /AP 뉴시스
1987년 8월 9일 스페인 마요르카 섬의 왕궁 계단에 아들인 해리 왕자(앞쪽), 윌리엄과 함께 앉아 있는 다이애나비. /AP 뉴시스
1986년 6월 아들 윌리엄 왕자의 학교운동회 어머니 경주에서 맨발로 달리고 있는 다이애나비. /AP 뉴시스
6개월 된 아들 윌리엄 왕자을 안고 밝게 웃고 있는 다이애나비. 1982년 12월 22일 켄싱턴궁. /AP 뉴시스
다이애나비 품에 안긴 해리 왕자가 카메라를 향해 혀를 내밀고 있다. 1988년 6월 버킹엄궁 발코니에서 찍은 영국 왕실가족 사진. /AP 뉴시스
영국 왕실 가족과 스페인 왕실 가족이 1986년 7월 마요르카의 마리벤트 궁전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 해리 왕자를 안은 다이애나비가 윌리엄 왕자를 바라보며 웃고 있다. 오른쪽은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왕. /AP 뉴시스
다이애나비와 해리 왕자. /뉴스1
1992년 2월 1일 카디프 암스 파크에서 열린 웨일즈 대 프랑스 파이브 네이션스 럭비 유니온 경기에서 다이애나비와 두 왕자가 박수를 치고 있다. /AFP 연합뉴스
결혼 직후부터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는 카밀라 파커볼스로 인해 불화했지만, 그들은 왕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자신들의 갈등을 감추어야만 했다. 원래 소극적이고 수줍은 성격이던 다이애나비는 언론과 세간의 관심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어려서부터 언론에 노출되면서 성장한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비의 고통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카밀라에 대한 질투와 남편에 대한 불신, 대중 앞에서의 가식적인 연기까지 모든 것이 다이애나비에게는 고통이었다. 그런 중에도 그녀는 윌리엄과 해리 두명의 왕자를 낳아 왕실의 대를 이어야 하는 왕세자비로서의 의무는 다했다. 그러나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의 결혼생활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면서 1996년 2월 이혼 합의를 공식 발표한 뒤 8월 28일에 이혼했다.
파경설 파다하던 1992년 방한
영국 왕세자 내외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는 화동들. /연합뉴스
다이애나비는 지난 1992년 11월 2일부터 5일까지 3박 4일간 찰스 왕세자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1883년 한·영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지 109년 만에 영국 왕실 인사로선 첫 공식 한국 방문이었고, 이들 부부의 마지막 외국 방문이었다. 당시 이 부부는 이미 파경설이 전세계에 파다했다. 방한 당시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는 한동안 공식석상에 부부동반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다이애나비는 11월 3일 오전에 찰스 왕세자와 함께 청와대를 방문했다.
이혼 후에도 자선·봉사활동
1993년 3월 히말라야 봉사활동을 나선 다이애나비가 네팔 어린이들과 인사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다이애나비가 1996년 6월 시카고를 방문, 한 소아과 병동에서 환자와 방문객을 만나고 있다. /AFP 뉴시스
1996년 6월 다이애나비가 시카고에 있는 노스웨스턴 메모리얼 병원의 호스피스 병동을 방문, 51세의 폐암 환자인 존 콜린스를 만나고 있다. /AFP 뉴시스
1997년 3월 17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넬슨 만델라(왼쪽)와 다이애나비가 만델라 자택 골든데일에서 만나고 있다. /AFP 연합뉴스
1997년 앙골라 지뢰밭을 방문한 당시의 다이애나비. /뉴스1
1992년 2월19일 로마를 방문해 테레사 수녀의 손을 잡고 있는 다이애나비. /뉴스1
짐바브웨 남동부의 네마주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 사이에 앉아 있는 다이애나비. /로이터 뉴스1
에이즈 양성인 아기와 포옹하고 있는 다이애나비. 1991년 4월 24일 브라질. /AP 뉴시스
다이애나비가 1997년 1월 루완다에서 다리가 절단된 환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AP 뉴시스
이혼 이후에도 다이애나비는 자선·봉사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전개했다. 짧은 숏커트 헤어스타일에 심플한 정장을 차려 입은 그녀는 세계 여기저기를 누비며 봉사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AIDS 퇴치·아프리카 빈민 구호·적십자 활동·대인지뢰 제거 운동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적극적으로 이어갔다. 특히 대인지뢰 추방 국제캠페인에 적극 관여해 앙골라·보스니아·르완다 등을 방문하기도했다. 열성적이고 진심어린 다이애나비의 사회 활동을 두고 전 세계가 감동했고, 다이애나비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비극적인 죽음, 36세의 짧은 인생
1997년 8월 31일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다이애나비. /로이터 뉴시스
1997년 9월 6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된 다이애나비의 장례식. 윌리엄 왕자, 얼 스펜서, 해리 왕자, 찰스 왕세자가 추모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다이애나비의 영구차를 지켜보고 있는 찰스 왕세자와 윌리엄, 해리 왕자. /로이터 연합뉴스
다이애나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슬픔에 빠진 영국 국민들. /로이터 연합뉴스
2018년 7월 10일 버킹엄궁 발코니에 메건-서식스 공작부인, 영국 해리 왕자-서식스 공작, 영국 캠브리지 공작 윌리엄 왕자, 영국 캠브리지 공작부인 캐서린(왼쪽부터)이 영국 공군RAF 100주년을 기념한 군사 비행을 관람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2021년 7월 1일(현지시간) 영국 윌리엄 왕세손(왼쪽)과 해리 왕자가 런던 켄싱턴궁에서 열린 고(故) 다이애나비 기념비 제막식에서 장막을 걷고 있다. /AP뉴시스
왕세자비의 지위를 잃었지만 봉사활동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다이애니비. 그녀는 1997년 8월 31일 교제 중이던 이집트 출신 재벌 2세 도디 알 파예드와 함께 파리 알마 터널에서 파파라치를 피해 고속 질주하던 중 차가 터널 안 중앙분리대를 들이받는 사고로 36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쳤다. 당시 윌리엄 왕세손은 15세, 해리 왕자는 12세였다.
장례식은 다이애나가 숨진 지 엿새째 되던 9월 6일 영국 왕실장으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됐다. 다이애나는 스펜서 가문의 영지에 안장됐다. 다이애나비가 숨진 8월 31일을 앞두고 그가 생전 거주하던 켄싱턴 궁에는 매년 추모 인파가 몰려든다.
ssahn@fnnews.com 안삼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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