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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시선] 풍년의 저주, 재정만능주의로 잡을 수 없다

[강남시선] 풍년의 저주, 재정만능주의로 잡을 수 없다
수확의 계절 가을이 한발 앞으로 다가왔지만, 풍년을 앞둔 농가의 심기는 어느 때보다 불편하다. 환율은 치솟아 오르고 에너지 가격도 이미 하늘 꼭대기에 붙어 있지만 유독 쌀값은 끝을 모르고 떨어지고 있어서다.

한반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물자는 언제나 쌀이었다.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식량자원이었고, 화폐로 쓰이기도 했으며 치부의 수단이 되기도 했던 게 쌀이다. 우리나라의 쌀 생산량이 수요량을 추월한 것이 1970년대 후반이었으니, 그 이전까지 이 나라에서 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부자'라는 인식이 통용됐다.

작년 말부터 쌀값이 본격적으로 하락하기 시작하더니 최근에는 폭락하고 있다. 20㎏ 산지 쌀값은 작년 대비 25%나 내려 4만2000원대다. 쌀 부족을 걱정하는 시대가 아닌 대신 오히려 '풍년의 저주'가 농가를 위협하고 있다. 여느 시장과 마찬가지로 가격하락은 공급과잉이 원인이다. 올해 우리나라 쌀 생산량 대비 소비량을 따져보면 적게 잡아도 30만t가량이 남아돌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세계무역기구(WTO) 협정 때문에 이 와중에 40만t가량의 외국 쌀도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한다.

통계청의 양곡 소비량 조사를 보면 2011년 국민 1인당 71.2㎏의 쌀을 먹었지만 2021년에는 56.9㎏으로 줄었다. 생산을 줄이지 않으면 쌀값은 앞으로도 계속 내려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개입해야 하는데, 어떤 방법을 쓰는지에 따라 수조원대 예산이 움직인다. 쌀값 폭락을 막기 위해 정부는 올해 신곡과 지난해 수확한 구곡을 합쳐 총 45만t을 사들이기로 했다. 이를 '시장격리'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유통되는 쌀을 거둬들여 창고에 넣어놓고 수요와 공급을 맞추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들어가는 돈만 1조원이다.

민주당은 최근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머릿수로 밀어붙이고 있다. 쌀값이 내려가면 정부가 '의무'로 시장격리를 해야 하고, 그때는 최저가격이 아닌 '시장가'로 한다는 게 골자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세금을 투입해 쌀값을 보장하라는 것. 정부는 우려하고 있다. 무조건 쌀값을 보장해주는 법이 생기면, 농가 입장에서 아무 걱정 없이 지금보다 더 많은 쌀을 생산할 수도 있어서다.


시장격리는 결국 쌀값이 오른 다음에야 취해지는 사후 약방문이다. 생산이 줄어들지 않으면 가격하락은 매년 반복될 수 있다. 그때마다 수조원대 돈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것에 국민적 동의를 얻을 수 있을까. '재정만능주의'의 유혹을 버리고 공급량을 미리 줄이는 현실적인 대책을 고민해야 할 때다.

ahnman@fnnews.com 안승현 국제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