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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인의 장수 비결… 외로움 덜어줄 ‘친구’ ['장수 박사' 박상철의 홀리 에이징]

Weekend 헬스
(9) 장수인의 우정, 그리운 친구
백세인 오랫동안 홀로 견뎌해야
친구만이 외로움 달래줄 수 있어
100세가 눈앞인 화천군 유 어르신
산 넘어 동갑내기와 왕래하며 의지
"이 나이에도 친구 보는 것이 좋아... 왕복 8시간 산길도 마다안해"
공자도 인생삼락 ‘벗과 교우’ 꼽아

백세인의 장수 비결… 외로움 덜어줄 ‘친구’ ['장수 박사' 박상철의 홀리 에이징]
인류 최초의 문자 기록으로 인정받는 점토판에 새겨진 설형문자를 해독한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최초 국가인 우루크(Uruk)의 영웅 길가메시에 관한 서사시가 바로 그것이다. 길가메시가 포악하여 신들이 그를 대결할 엔키두를 보내어 싸우게 했으나 결국 이들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러다 엔키두가 죽게 되자 이를 슬퍼하여 최고의 현자인 우트나피쉬팀을 찾아가 불사약을 부탁했고 가르쳐준대로 목숨을 무릅쓰고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 환생초를 찾았으나, 기진맥진해져 바닷가에서 잠깐 졸다 깨어보니 환생초를 뱀이 먹어버린 것을 발견하고 통탄했다는 내용이다. 인간이 영생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보여주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죽음도 무릅쓰고 친구를 구하려는 우정과 죽어가는 생명을 연장하려는 간절한 노력이 결합된 우정과 장수를 연결한 기록이 바로 인류 최초의 서사시다. 인류의 첫번째 기록으로 남겨진 우정과 수명 연장을 추구하는 노력은 인류 역사의 사회적 및 과학적 발전의 결정적 동인이 무엇이었을까 유추하게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우정은 중요한 주제였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아킬레스는 여신 테티스와 인간 펠레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영웅으로 불사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트로이 전쟁에서 절친인 파트로클로스가 적장인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하자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경고를 무릅쓰고 참여해 복수한 다음 결국 치명적인 약점이 노출되어 죽게 된다.

동양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고의 고전인 삼국지의 핵심 내용은 도원결의를 맺은 유비, 관우, 장비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절대적 우정 이야기다. 비록 한날 한시에 태어나지 못했지만 한날 한시에 죽자는 맹세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정의 거룩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우정은 젊은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우정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이 아닐 수 없다.

한국 백세인 조사에서 밝혀진 백세인의 출생 자녀 수는 평균 6명 정도인데 반해 생존 자녀는 3명 정도였다. 백세인 중 배우자가 있는 경우는 3%에 불과했고, 평균 사별 시기는 남자 68세, 여자 62세로 배우자 사별 후 30~40년을 홀로 살았다.

백세인과 함께 살고 있지 않은 직계자녀들의 방문 빈도 조사에서 월 1회 이상은 40%에 불과했고, 연간 1~2회, 집안 행사 때만, 그리고 전혀 접촉이 없는 경우가 각각 20% 정도씩이었다. 이러한 조사 결과는 백세인은 오랫동안 거의 홀로 고독을 견뎌내야만 하는 사람들임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자녀에게 의존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고 결국 가까이 있는 이웃이나 친구만이 도움을 주고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다. 백세인의 친구를 향한 절절한 사례를 소개하고 소중한 우정의 의미를 새겨본다.

강원도 화천군의 백세인을 찾아 가는 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수피령 고개를 넘어 화천읍으로 들어서서 파로호를 돌아 간동면 도송리의 유근철님을 만났다. 유 할아버지는 아들 내외와 함께 살고 있었다. 유 어르신은 98세까지 논밭을 직접 관리하다가, 낙상 후 비로소 자식들과 함께 관리했다. 그러나 예금통장은 따로 관리하고, 자신이 필요한 옷가지라든가 물건들을 직접 구입하고 있었다. 백살이 되더라도 자신의 일은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관리하는 철저한 생활 태도였다.

"일하는 것이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할아버지는 "그냥 심심해서 일해"라고 답했다. 너무도 간단하고 당당한 답이었다. 일하지 않을 때는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산 넘어 동갑내기 친구가 있어 놀러 다녀." 백세인에 동갑내기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 산을 돌아 유 어르신의 동갑내기 친구, 송기구님을 찾았다. 어르신은 밀짚모자를 쓰고 뙤약볕 아래서 풀을 매다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르신이 도회지 사는 자식들이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자랑하여서 "왜 자식들과 함께 사시지 않느냐"고 물으니 "내 땅이 있어서 여기 살아"라는 답이 돌아왔다. 자신의 할 일에 대한 강한 의욕을 보이면서, 죽더라도 그곳에서 살다가 죽고 싶다고 했다.

산 넘어 사는 친구에 대해 물었다. "응, 산 너머 동갑내기 친구가 있어서 좋아. 그래서 서로 오고 가고 해. 요즘은 그 친구가 다리가 아파 주로 내가 찾아가." 산 너머의 유 할아버지에게 일주일이면 한 두 번씩 찾아간다고 했다. 그런데 시골길 가다 길을 물으면 으레 말하는 한 오리 거리라는 것이 가다 보면 끝도 없는 먼 길임을 깨닫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산 너머라는 것이 보통 길이 아니었다. 험한 산을 넘어가야 하는 먼 길인데도 그냥 심상하게 말하고 있었다.

실제로 가는데 4시간, 오는 데도 또 4시간이 걸린다는 산길이었다. 백세 어르신들이 서로 만나고 싶어서 이런 산을 넘어서 오고 가고 있었다. 두 분이 험한 산길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서 물었다.

"그렇게 힘들여 가서 만나면 무엇을 하느냐?" "하기는 뭘 해. 그냥 앉아있다가 오는거지. 이 나이 되도록 친구가 있다는 것이 좋아. 그 친구 없다면 어쩌겠어?" 그야말로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이었다. 그냥 친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고난을 이겨 낼 수 있다는 너무도 명백한 진실이었다. 아무리 가족이 있어도 동갑내기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서 두 분의 백세인은 서로 믿고 의지하고 있었다. 첩첩산중에서 만난 백세인들은 우정에 바탕을 둔 거룩한 건강으로 축복받는 장수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아흔이 넘어서면 주변에 동년배 친구들이 거의 없게 마련이다. 가족과는 다른 의미에서 마음을 터놓고 고민을 나누던 친구들이 사라지게 되면 밀려드는 고독에 고통을 받게 된다.
그래서 먼 동네라도 비슷한 연배가 있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안심하는 백세인을 만나면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나이에 상관없이 우정이 얼마나 소중하고 거룩한가 다시금 새기게 된다. 오히려 나이 들면 들수록 더 절실하게 친구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공자도 사람이 살면서 가장 큰 세가지 기쁨(人生三樂)에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기(有朋自遠方來)를 포함하였다.

박상철 전남대 의대 연구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