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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애를 보고 죽어야 여한이 없겠어요"[잃어버린 가족찾기]

"죽어도 애를 보고 죽어야 여한이 없겠어요"[잃어버린 가족찾기]
정운이를 찾고 있는 생모 유정희씨

"죽어도 애를 보고 죽어야 여한이 없겠어요"[잃어버린 가족찾기]
정운이를 찾고 있는 생모 유정희씨
[파이낸셜뉴스] "죽어도 그 애를 보고 죽어야 여한이 없겠어요."
유정희씨(사진)는 올해로 52세가 된 아들(김정운·1971년생)이 여전히 그립다. 두살이 된 아들과 생이별한 이후 지금까지 한순간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있던 아들의 돌사진마저 없어져 그리움은 더 크다.

유씨의 사연은 그가 20살이었던 1969년에 시작됐다. 당시 중매로 전남편과 경기도 파주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결혼식도, 혼인신고도 하지 못하고 시작한 동거 중에 이미 한차례 아픔이 찾아왔다. 첫째 아이의 유산이었다. 그 와중에도 여자와 도박, 술에 빠져 가정을 지키지 않은 남편이 미웠다.

이내 둘째 정운이가 들어섰다. 1970년의 일이다. 하지만 전남편의 행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막막했던 유씨는 고향인 전남 목포로 내려갔다. 전남편은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살던 형을 찾아가서 직장도 마련해 자리를 잡으면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미운 남편이었지만 어린 나이였던 유씨는 불러오는 배를 보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렇게 시간은 2~3개월이 훌쩍 지나갔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유씨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전남편을 찾아 나섰다. 수소문 끝에 찾은 전남편과 한바탕 싸운 이후 전남편의 형이 사는 집에 들어갔고 거기서 정운이를 낳았다. 1971년 3월 13일이었다.

정운이가 태어나자 전남편은 형과 함께 벽돌공장에서 일했다. 그 기간이 오래가진 않았다. 일하면서 형과 싸우는 등 집안은 늘 시끄러웠다. 어느 날에는 전남편 형이 전남편은 새장가를 보내고 정운이를 빼앗아 본인이 키우겠다고 말했다. 정운이를 지키겠다는 생각에 유씨는 다시 목포로 도망 아닌 도망을 갔다.

고향 목포로 돌아간 것은 1971년 8월께였다. 너무 막막했던 유씨는 살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몸을 돌보지 않고 일했다.

두달을 살았을까 목포로 전남편이 찾아왔다. 또 다시 목포에서 전남편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는데 덜컥 정운이 동생까지 생겼다. 아직 혼인신고도, 정운이 출생신고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또 생겼다. 전남편이 서울로 가서 예비군 훈련을 하고 오겠다고 떠난 이후 연락이 끊어졌다. 정운이 하나도 힘든데 남편 없이 둘째까지는 도저히 삶이 불가능했다. 그렇게 병원을 찾았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

병원을 찾은 이후 둘째와 이별하는 과정에서 몸에 탈이 났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힘겨운 삶의 과정에서 몸이 상한 상황에 버티기 어려운 수술까지 했기 때문이다. 겨우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정운이가 없었다. 유씨가 죽겠다고 생각한 가족들이 전남편에게 정운이를 데리고 가라 했다는 것이다.

정운이를 데려간 전남편과 그의 형은 정운이를 다시 누군가에게 줘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1972년부터 유씨는 아들 정운이와 이별 중이다.

유씨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다시 전남편과 살다가 20여년 전에 이혼했고 지난 11년간 '영등포 교도소(현 서울남부교도소) 붕어빵 장사를 하면서 살았다"며 "(정운이만 생각하면) 못 길러줘서 미안하고 부모 노릇 못해서 미안하다. 정운이는 내가 버렸다고 생각하고 원망도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coddy@fnnews.com 예병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