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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석 칼럼] 서울의 빈 살만

[노주석 칼럼] 서울의 빈 살만
데이비드 린 감독의 1962년 작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세기의 명화로 꼽을 만하다. 한 개의 점에서 시작돼 3분간 롱테이크로 펼쳐지는 사막 속 낙타를 탄 남자의 등장 신은 압권이다. 여러 번 감상했지만 영화의 등장 장면 중 가장 숨 막힌다는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중동지역에서 영국군 정보장교로 활약한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1888∼1935)의 30대 시절 이야기다.

영화를 본 사람은 많지만 영화 속 시대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오늘날 중동의 비극, 전쟁과 테러의 씨앗은 서구 제국주의가 정한 3개의 틀에서 잉태됐다. 후세인·맥마흔 서한은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영토인 팔레스타인에 아랍인들의 국가를 세우는 데 찬성한 영국의 책략이다.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은 영국과 프랑스의 오스만 제국 영토 나눠먹기였다.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 선언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국가 수립을 지지해 분란의 원인을 제공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파 갈등이나 무슬림의 역사·문화·종교는 무시됐다.

영화 한 편으로 중동의 현실을 파악하긴 어렵다. 로렌스를 중심으로 한 영웅 담론과 오리엔탈리즘은 한계가 분명하다. 후에 로렌스는 자신이 제국주의의 앞잡이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환멸에 빠진 로렌스는 훈장을 반납하고, 젊은 날의 치기를 후회했다. 대령 예편 후 군대를 들락날락하다 오토바이 사고로 47살 때 숨졌다.

37살 무함마드 빈 살만이 17일 서울에 온다. 이슬람 수니파의 종주국이자 석유 부국인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왕세자 겸 총리 신분이다. 그는 로렌스 이후 중동이 낳은 최고의 유명인사이다. 별명이 '미스터 에브리싱'인 그는 영화에서 로렌스로 분했던 피터 오툴 못지않은 출중한 외모에 추정 재산 2조달러에 이르는 '비공인' 세계 최대 부호이다.

숱한 이복형제들 중 존재감 없고, 과묵하며, 차가운 성격의 왕자에 불과했던 그는 2015년 최연소 국방장관에 오른 뒤 2017년 왕세자로 즉위하면서 개혁 성향의 독재자로 거듭났다. 승계 과정에서 뿌린 피 때문에 "무한한 자원을 가진 살인자이며, 감정이 없는 사이코패스"라는 악평을 얻었다. 2018년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자말 카슈끄지 살해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다.

빈 살만의 서울 행보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그가 결정권을 쥔 700조원짜리 도시 건설과 12조원짜리 원전사업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 5대 그룹 총수가 그와의 만남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찾아오면 얼마나 바쳐야 하는지 고민하지만 빈 살만에게선 얼마나 얻어낼지 궁리한다는 점이 다르다. 빈 살만은 할리우드 영화 '블랙팬서'에 나오는 미래 왕국 와칸다의 실현을 꿈꾼다. 그가 세우려는 네옴시티는 서울의 44배에 이르는 SF 공상영화 속 미래도시이다.

사우디 수도 리야드가 부산과 2030년 세계엑스포 유치를 두고 각축 중이란 점이 최대의 걸림돌이다.
항간에는 빈 살만이 엑스포 개최권 양보를 네옴시티 건설 참여의 지렛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설이 떠돈다. 엑스포 개최냐, 중동 특수냐, 두개 다냐가 문제다. 속을 알 길 없는 야심만만한 빈 살만이 '제2의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joo@fnnews.com 노주석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