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오래 알고 지낸 지인들과의 저녁 자리에서 요즘 비싼 기름값과 가스값 얘기가 도마에 올랐다. 마침 이명박 대통령 시절 해외자원개발과 관련해 정부와 협업을 담당했던 인사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때 사업을 제대로 했다면 지금 같은 위기에 그나마 숨통이 트이지 않았겠냐고 묻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당시 경험을 얘기해줬다.
MB 시절 자원개발 사업의 방향성은 문제가 없었는데, 이를 수행하는 공무원들의 일하는 방식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자원개발은 십수년간 백번 넘게 실패하더라도 한 번만 성공하면 되는 것인데, 당시 문외한에 가깝던 공무원들이 지나치게 실적에 집착하는 바람에 무리수를 남발했다는 것이다. 청와대에서 매일같이 쪼아대는 통에 공무원들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게 그의 토로였다.
정부가 주도하는 사업이나 정책에서 기계적인 실적주의가 문제로 지적된 것은 오래전부터 이어진 일이다. 정부가 사업 목표치를 세우면 각 부처와 산하 공공기관에는 소위 '할당'이라는 목표치가 떨어진다. 이유 불문 이를 채워야 하는 게 공무원들의 일하는 방식인데, 그러다 보면 '실적을 위한 실적' 쌓기 경쟁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지난 정권의 무분별한 태양광 확장이나 공공일자리 등이 알맹이 없는 숫자 부풀리기의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된 바 있다.
얼마 전 기획재정부가 공공기관 재정건전화 방안을 내놨는데, 벌써 '묻지 마' 실적 쌓기로 변질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관가에 팽배하다. 공공기관들의 불필요한 자산을 팔고, 직원복지를 줄이고, 인력감축과 예산삭감이 기재부의 요구다. 문제는 앞뒤 안 가리고 목표치부터 내거는 바람에 방법론에 대한 고민은 고스란히 공공기관들이 떠안게 됐다는 점이다. 정년이 보장되는 공공기관에서 인력을 줄이려면 신규 채용을 막는 방법뿐이다. 필요하지 않은 자산을 매각하라지만, 14조5000억원이라는 금액에 맞추려면 그 와중에 알짜 자산들이 헐값에 팔려나가는 일이 안 생기리라는 보장이 없다.
공공기관들은 말 그대로 공공사업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기관들이다. 부채가 쌓이고 적자가 나는 것은 ‘이윤'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태생적인 구조에서 출발한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부채와 적자의 책임에 '방만'이라는 딱지를 붙여 공공기관을 두들겨 패는 일은 과거에도 있었다. 대중들에게 일시적인 환호를 얻을지 모르겠다. 대신 공공기관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국민이 더 비싼 전기료와 가스비와 난방비를 내야 한다는 사실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방만 경영이 있다면 바로잡고, 부실은 제거하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절차와 결과에 있어 효율성과 합리성이 최우선시돼야 한다.
공공기관은 국민의 생활을 책임지고 있는 안전선이다. 기계적인 실적주의로 재단한다면 본연의 기능에 차질을 빚을 우려가 크다. 공공기관을 정부 정책의 실험용 쥐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할 때다.
ahnman@fnnews.com 안승현 국제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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