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 정책으로는 사고 감축 한계
정부 지침 토대로 자체 규범 마련
노동계 "경영책임자 처벌 면피"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11월 30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에 대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가 중대재해를 줄이기 위해 처벌 중심의 현행 중대재해처벌법에서 기업 등 안전주체들의 책임을 강화한 '예방 역량' 향상을 지원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튼다. 올해 1월 처벌·감독 중심인 중대재해법 시행 이후에도 사망사고가 끊이질 않고 있어서다. 규제와 처벌에 중점을 둔 정책으론 산업현장 사망사고를 줄이기 어렵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기업들의 예방 역량 강화로 선진국형 자율적 산업 안전체계를 갖추겠다는 구상이다. 다만 자율에 방점을 찍었지만 '위험성 평가'를 의무화했다. 만약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시정명령 또는 벌칙을 주는 근거조항도 신설한다.
11월 30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중대재해감축 로드맵'은 산업안전감독 당국인 고용부가 획일적인 정기감독을 지양하고 노사 스스로 '위험성 평가 점검'을 하는 것이 핵심이다. 위험성 평가는 노사가 함께 사업장 내 유해·위험 요인을 스스로 파악해 개선대책을 수립·이행하는 제도로, 2013년 도입됐다. 그러나 강제성이 없고 자기규율 방식과 맞지 않는 감독과 법령이 현재까지 유지돼 대부분의 기업이 실시하지 않고 있다.
고용부 관계자는 정책 전환 배경에 대해 "우리나라는 1981년 산업안전보건법 제정 이래 규제와 처벌에 주안점을 뒀다"며 "이에 많은 기업이 안전 역량을 체계적으로 향상하는 일보다 당장의 처벌을 피하기 위한 서류작업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 것이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당장 내년부터 근로자 '300인 이상'인 대기업부터 위험성 평가를 의무화한다. '300인 미만' 중소기업의 경우 업종·규모에 따라 2024년부터 연차적으로 적용·확대하기로 했다. 2024년 '50~299인', 2025년에는 '5~49인'으로 확대·적용한다.
위험성 평가 의무를 지키지 않거나 부적정하게 실시한 사업장에 대해서는 시정명령 또는 벌칙을 부과하는 관련법 조항을 신설한다.
중대재해 발생 시에는 철저한 원인규명에 대한 수사를 통해 엄중 처벌·제재한다는 계획이다. 또 중대재해 발생 사업장은 산업재해 보험료를 할증하고, 산재보험 미가입 사업장은 보험료 징수 상한액을 현행 5배에서 10배로 상향하는 채찍도 마련한다.
다만 위험성 평가 의무를 제대로 이행했음에도 중대재해가 발생한 경우에는 노력 사항을 수사자료에 적시함으로써 재판 시 정상참작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 기업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끌어내기 위한 조치다. 관심이 쏠렸던 중대재해법 시행령 개정 방향은 발표가 미뤄졌다. 다만 중대재해법이나 산업안전보건법 등 정비를 위한 '산업안전보건법령 개선 TF'를 내년 상반기 구성해 개선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중대재해법 적용 사업장에서 중대재해가 오히려 늘어나는 역설적인 현상이 발생했다"며 "2024년 '5인 이상 50인 미만' 사업장에 법이 적용되기 전 개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올해 중대재해법이 시행됐지만 1~9월 산재 사망자는 510명으로 전년동기보다 8명 늘었다.
중대재해법은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안전조치를 소홀히 한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 등에게 '1년 이상의 징역형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 법인의 경우 50억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노동계는 정부의 중대재해법 개정 의도가 경영책임자에 대한 처벌을 면피해 기존 법 취지를 무력화할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honestly82@fnnews.com 김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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