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기업 자율에 초점을 맞춘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마련한 것은 규제·처벌에 방점을 둔 기존 정책으로는 사고를 줄이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중대재해 관련 법안을 도입한 영국·독일 사례를 참고하며 로드맵을 만들었다. 다만 노동계에서는 결국 시행 1년도 안 된 중대재해처벌법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 아니냐며 반발하고 있다.
11월 30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마련하면서 선진국 정책사례를 참고하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노사 의견을 청취했다. 특히 영국과 독일 사례를 많이 연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영국에서는 노동당 의원과 노동부 장관 등을 지낸 알프레드 로벤스가 1972년 작성한 '로벤스 보고서'가 유명하다. 이 보고서는 1960년대 영국에서 대규모 중대재해가 잇따르자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한 차원에서 작성됐다. 현재 영국의 안전보건 법제는 이 보고서 내용을 대폭 수용해 만들어졌다. 200여쪽에 달하는 이 보고서는 '정부 등 외부기구에 의한 네거티브 방식의 규제로는 사업장의 안전보건에 극심한 한계가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자율규제 시스템'을 제시했다.
독일 역시 규제·처벌의 한계를 인식하고 '자율 예방체계'를 구축했다. 그 결과 두 나라는 사고사망 만인율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었다. 우리나라 사업장에는 여전히 '빨리빨리' 문화가 남아 있고, 안전체계 구축을 '돈 드는 일'로만 보는 경향이 있다.
정부는 이번 대책을 발표하면서 '자율'이라는 용어가 주는 부정적 이미지를 우려한 듯 사실상 같은 의미인 '자기규율'이라는 표현을 썼다. 일각에서는 중대재해 예방을 기업의 자율에 맡기면 근로자 사망사고가 오히려 늘어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영국과 독일 등도 '자기규율 예방체계'로 전환할 당시 많은 비판이 제기됐지만, 이 같은 방식이 중대재해 감축을 위한 가장 효과적 전략이라는 데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고 결국 성과를 거뒀다는 것이 정부의 설명이다.
이처럼 정책 패러다임이 전환됨에 따라 올해 1월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도 비슷한 방향으로 개정이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노동부는 실제 경영계를 중심으로 개정 요구가 많은 중대재해처벌법을 '자기규율 예방체계'에 맞게 손봐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이 법과 관련해서는 형사처벌 강화, 경영책임자(CEO) 처벌 대신 과징금 부과로 전환, 산업안전보건법과 일원화 등 다양한 의견이 있다.
정부는 중대재해처벌법상 제재방식 개선안은 내년에 마련하기로 했다.
하지만 법을 개정하려면 국회 논의 과정이 필요한데 올해 1월 시행된 법이 아직 안착하기도 전에 개정을 추진하는 데 대해 야당과 노동계에서 사실상 경영자 처벌규정을 완화하려는 시도라며 반발하고 있어 논의 과정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중대재해처벌법은 법 규정이 모호하다는 논란 속에 경영자 처벌로 이어진 사례는 아직 한 건도 없다.
노동계 관계자는 "안전수칙을 어긴 근로자에 대한 제재는 필요하지만 근로자에게 어떤 권리나 의무도 부여하지 않고 직책만 주는 게 현실"이라며 "권한이나 여건 보장은 않은 채로 직책만 주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leeyb@fnnews.com 이유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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