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 전문가들 "공공성 있다고 공공재는 아냐...생산적 방향으로 논쟁해야"
서울 시내에 설치되어 있는 주요 은행들의 현금인출기. 2023.1.9 pdj6635@yna.co.kr
[파이낸셜뉴스]윤석열 대통령의 '은행은 공공재' 발언을 둘러싸고 논란이 뜨겁다. 지난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오랜 논란거리였던 은행을 둘러싼 공공성 논쟁이 공공재 논쟁으로 한 발 더 나간 모양새다. 윤 대통령과 금융 당국은 ‘주인 없는 기업’으로 불리는 주요 금융회사를 공공재로 규정했다. 이후 금융당국은 자금시장 경색을 풀기 위한 유동성 공급, 영업시간 정상화 등에서 나아가 대출금리 인하와 예대마진 축소라는 시장 자율성을 제한하는 요구까지 하고 있다. 여기에 최근 금융지주 최고경영자(CEO) 인사 및 지배구조에도 개입해 신(新)관치 논란마저 불거지고 있다. 학계와 은행권, 금융투자업계에서는 "공공성은 인정하지만 공공재는 너무 나간 발언"이라며 민간기업의 시장성과 자율성을 흔드는 과도한 개입은 자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은행은 공공재..과점 이익 나눠야"
12일 업계에 따르면 은행 공공재 논란은 올해 1월 30일 금융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언급하면서 시작됐다.
윤 대통령은 이날 업무보고 마무리 발언에서 "은행은 공공재 측면이 있기 때문에 공정하고 투명하게 거버넌스를 구성하는 데 정부가 관심을 보이는 것은 관치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금융 당국도 이에 동조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금감원장직에 취임할 때부터 은행의 공적인 역할에 대한 입장을 견지해 왔다"며 "대통령 말씀에 거의 공감한다"고 했다.
금융당국이 은행은 공공재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과점 체제 △공적자금 투입 △규제 산업 등 크게 세 가지다.
먼저 은행업이 정부의 인허가 산업이라는 것이다. 시중 은행들이 연간 수십조 원대의 이자 수익을 거둘 수 있는 데는 은행업 진입이 제한되면서 생기는 과점 체제의 영향이 있다는 주장이다.
과거 위기 시 은행에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해 구조조정을 했던 사실 역시 은행이 공공재임을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예를 들어 지난 1997년 말 IMF 외환 위기 당시 대형 은행을 비롯한 주요 금융회사들이 줄줄이 부실화되자 정부는 168조원이 넘는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그만큼 사회적 책임을 지는 게 당연하다는 주장이다.
금융권에 대한 규제는 전 세계적인 흐름이라는 점도 내세운다.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는 "금융회사는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 측면 등을 고려했을 때 완전한 민간·자율영역에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며 "세계 대다수 국가들이 금융사의 자본 적정성에 대해 규제를 하고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미국의 경우에도 금융사들이 위기상황에 대비해서 자본을 쌓도록 한다"고 설명했다.
■"공공성 있다고 공공재 아니다"
반면 경제학계에서는 공공재란 경제학 용어를 은행에 사용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했다.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1월 31일 서울대 경제학부 게시판에 "(윤 대통령이) 은행을 '공공재'라고 부른 것은 경제학의 기본에 어긋나는 실언"이라고 꼬집었다. 이 교수는 "이 세상 어느 곳의 경제학원론 교과서를 들춰봐도 은행을 공공재의 한 예로 드는 경우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면서 "공공성이 있다는 뜻에서 아무 상품이나 공공재라고 부르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라고 경계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윤 대통령이 은행이 아닌 '은행 서비스'를 공공재라고 불렀어야 했다고 그는 지적했다. 모든 사람들이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재화 또는 서비스를 공공재라고 하는데 재화 또는 서비스는 사고파는 대상이기 때문에 은행이 아닌 은행 서비스가 맞다는 얘기다.
이 교수는 공공재의 두 가지 조건(소비의 비경합성과 비배제성)을 모두 충족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은행과 은행 서비스 모두 공공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수만 명의 사람들이 은행에 몰려가 동시에 은행 서비스를 받을 수(비경합성) 없고 △은행에서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해 요금을 지불하지 않은 고객을 배제(비배제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윤 대통령의) 고려 대상이 '잘 운영되는 은행 시스템이 주는 혜택'이라고 한다면 공공재의 성격을 인정할 여지가 생긴다"라며 "그러나 거두절미하고 그저 '은행은 공공재'라고 말한다면 100% 틀린 말"이라고 비판했다.
■"은행은 주주 있는 민간기업"
은행권과 금융투자업계에서는 당국에서 은행을 공공재라 칭하며 간섭하는 것은 '신관치'라며 불만을 터트리고 있다.
은행의 공적 책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시중 은행이 공기업이 아니라 주주가 있는 민간 기업이라는 점에서 자율성과 독립성을 흔들어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은행이 공공성을 지녔다는 측면에서 대출금리·수수료 인하나 사회공헌 확대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한다"면서도 "민간 기업의 배당정책이나 지배구조, 경영방식 등에 대해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과도한 것 아니냐"고 반발했다.
또다른 은행권 관계자는 "인위적인 대출금리 인하와 예대마진 축소 등 시장 자율성을 제한하는 요구를 공공연하게 하는 것은 금융 시스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며 "궁극적으로는 은행의 체질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금융투자업계에서도 은행은 증시에 상장돼 민간 주주들이 지분을 보유한 엄연한 민간 기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다른 기업과 마찬가지로 영업 활동을 통해 수익을 얻고, 이를 다시 주주에게 배당하는 만큼 은행 역시 이윤 극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KB금융지주·신한금융지주·하나금융지주는 국민의 연금을 운용하는 국민연금공단이 최대주주다. 우리금융지주도 민영화를 이뤘고, 농협금융지주는 농민들의 협동조합인 농협중앙회가 보유하고 있다.
■"공공성은 있어..생산적 논쟁을"
전문가들은 은행이 공공성을 갖고 있다는 데는 동의하면서도 논쟁이 해결책을 모색하는 생산적 방향으로 전개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종욱 서울여대 명예교수는 "금융 역사로 보면 은행 등 금융사에 시스템적 위기가 왔을 때 공적자금이 투입된다. 공공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라며 "이런 측면에서 감독당국이 대손충당금을 쌓으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비율을 어느 정도 해야 할지는 민간영역이 예측 가능하도록 하는 것도 당국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당국이 금융권의 위기관리책을 감독해야 하겠지만 전방위 규제로까지 번져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남재현 국민대 경제학과 교수는 "은행업은 라이선스 비즈니스이고 일정 부분 독점적 이윤을 향유하는 측면이 있어서 공공성을 가지고 있다"면서도 "정부의 개별적인 경기부양책이나 행정부의 기조와 관련 인사문제까지 공공성이라는 명목으로 은행에 과도한 요구를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김홍기 연세대 로스쿨 교수는 "은행은 경제 시스템의 기간으로서 공적 성격과 영리 단체적 성격을 함께 가진다"면서 "그 비중은 해당 국가의 경제구조와 발전단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구체적 사안에 따라 가장 합리적으로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결정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sjmary@fnnews.com 서혜진 김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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