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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숙 칼럼] 튀르키예 폐허를 딛고

[최진숙 칼럼] 튀르키예 폐허를 딛고
아폴로 신전을 뒤로하고 아이들은 공을 차고 있었다. 신전 앞 민가의 뜰에선 젊은 여인이 빨래를 널고 있다. 10여년 전 튀르키예 서부 고대 헬레니즘 유적지를 다닐 때 이런 풍경을 자주 봤다. 들판에서, 산길에서 수천년 된 유물들이 아무렇지 않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튀르키예는 거대한 신화의 땅이었다.

성서의 주요 인물들이 생을 바친 곳도 튀르키예다. 이방인들에게 처음 기독교를 전파한 이가 사도 바울이었다. 그는 지중해 연안 타르수스 출신이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던 에페수스는 기독교인들에게 성지로 꼽힌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여기서 태어났다. 세계사 문명을 바꾼 대제국의 영광과 상처는 아나톨리아 반도 곳곳에 남아 있다. 철기시대를 연 히타이트부터 페르시아, 비잔틴, 오스만까지 무수한 제국이 여기서 꽃을 피우고 사그라졌다.

튀르키예의 근현대는 우리와 많이 닮았다.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의 카리스마에서 근대가 출발한다. 케말은 터키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600년 오스만 통치를 끝냈다. 그렇게 탄생한 터키공화국의 역사가 올해로 100년이다. '종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공적 영역에 개입해선 안 된다.' 서구로 가는 길을 연 케말주의의 핵심이다. 하지만 과도한 국가개입 경제, 군부의 전제정치 폐해는 지금까지 이어진다.

정국은 평온한 날이 없었다. 극심한 좌우 대립, 케말주의자와 이슬람 종교세력의 갈등에 정치는 요동쳤다. 가난한 내륙의 농민들은 이슬람 신앙에 더 빠져들었다. 이를 이용한 이슬람 세력들이 힘을 얻으면 군부가 움직였다. 군부 쿠데타는 1960년 처음 발발해 지금껏 여섯 차례나 된다. 그중 네 번이 성공한 쿠데타였다.

옛 영광을 되찾자며 지친 국민들을 파고든 이가 올해로 20년 철권통치자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다. 인구 상당수를 차지하는 도시 밖 빈민가, 아타튀르크 후예들에게 억압받은 상공인들이 그의 콘크리트 지지층이다. 에르도안은 이슬람 복원을 외치며 21세기 술탄을 자처한다. 집권 초 순풍을 탔던 경제가 그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지금 경제는 거듭된 실정으로 바닥까지 추락했다. 이 고통 속에 강진까지 나라를 덮쳤다.

튀르키예는 지금 통곡의 땅이 됐다. 리히터 7.8 규모 지진은 1주일 새 3만명 가까운 목숨을 앗아갔다. 눈물과 탄식이 뒤범벅이다. 잔해 아래 깔린 이들이 20만명에 이를 것이라는 추정까지 나온다. 여러 지각판이 충돌하는 튀르키예는 지진이 잦은 나라다. 지난 1999년에도 대참사를 겪었다. 그러고도 부실공사가 만연했고, 대비는 소홀했다. 국가는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내전 중인 이웃 시리아의 참상도 말할 것 없다. 전 세계가 보여준 인류애는 놀랍다. 구조의 손길이 줄을 잇고, 극적 생환 소식에 세계인들이 열렬히 호응하고 있다.

격동의 시간을 견뎌온 튀르키예인들에겐 고유의 슬픔이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튀르키예 작가 오르한 파무크는 회상록 '이스탄불-도시 그리고 추억'에서 그 슬픔은 변방으로 밀려나 아시아도 유럽도 되지 못한 나라에 대한 비애라고 했다.
그렇지만 파무크는 "폐허와 비애, 그리고 한때 소유했던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에 더 사랑한다"는 글도 썼다. 그래도 삶은 낙관이라고 믿는 것이다. 희망이 폐허를 딛고 더 강해질 수 있기를 빈다.

jins@fnnews.com 최진숙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