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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침체 우려 커진 美, 정치권은 은행 사태 ‘네탓 공방’ [글로벌리포트]

민주 "트럼프 금융규제 완화 원인"
공화 "바이든 정부 대규모 지출
인플레 일으켜 금리 인상 초래"
SVB·시그니처銀 예금 전액 보호
美 금융당국 조치 두고도 논란
SVB 사태에 중소은행 대출 축소
골드만삭스, 美성장률 전망치 하향
웰스파고, 美 침체 확률 65%로↑

경기침체 우려 커진 美, 정치권은 은행 사태 ‘네탓 공방’ [글로벌리포트]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었던 미국에서 약 15년 만에 처음으로 중형 은행들이 연달아 파산하면서 책임 소재를 놓고 격렬한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여당에서는 규제 완화와 대형은행의 책임을 문제 삼았으며, 야당은 방만한 예산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동시에 미국 안팎에서는 사후처리 방식을 두고 원칙을 어겼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시장에서는 이번 사태로 미국 내 대출이 위축될 수 있다며 경기 침체 가능성이 커졌다고 분석했다.

■'규제와 대형은행' vs '인플레 방관'

지난 10일 폐쇄 이후 파산 절차에 들어간 실리콘밸리뱅크(SVB)는 채권에 과도하게 투자한 상태에서 최근 금리 인상으로 기업 고객들이 예금을 빼내자 현금이 부족해졌다. 은행은 현금 확보를 위해 금리 인상으로 가격이 폭락한 채권을 헐값에 팔았고 여기에 대량현금인출(뱅크런)이 겹치면서 영업이 어려워졌다. 재무구조가 비슷했던 시그니처은행에서도 10일부터 뱅크런 조짐이 보였고 금융당국은 위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12일 시그니처은행마저 폐쇄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13일 기자회견에서 '도드·프랭크법'을 언급하고 전임 도널드 트럼프 정부에서 일부 조항을 완화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2010년에 금융 규제를 강화하는 해당 법안을 제정했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는 2018년에 재무 건전성 규제를 받는 은행의 자산 규모를 500억달러(약 65조원)에서 2500억달러(약 325조원)으로 상향했고 SVB와 시그니처은행 모두 해당 조치로 집중 규제 대상에서 빠졌다. 이들은 덕분에 매년 받던 재무 건전성 평가를 2년에 한 번씩 받거나 면제받을 수 있게 됐다.

민주당의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과 케이티 포터 하원의원은 이번 사태 직후 2018년 규제 완화를 철폐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역시 15일 발표에서 "우리는 더욱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며 양당이 합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17일 민주당 하원의원 20명은 미 법무부와 금융감독기관에 서한을 보내 SVB가 채권 투자 당시 골드만삭스가 자문사 역할을 했으며 이후 SVB가 급히 내놓은 채권을 사들였다고 지적했다. 이어 골드만삭스가 이번 사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화당의 케빈 맥카시 하원의장은 14일 트위터를 통해 "바이든의 무모한 지출이 기록적인 물가상승(인플레이션)을 일으켜 가파른 금리 인상을 초래했고, 그 결과 가계와 은행이 함께 파산했다"고 비난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12일 자신의 SNS를 통해 바이든의 경제정책 실패가 이번 사태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는 1929년보다 훨씬 크고 강력한 대공황을 맞을 것"이라며 "은행이 벌써 붕괴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안팎에서 '구제금융' 논란

미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연준),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12일 공동성명을 내고 SVB와 시그니처은행의 모든 예금을 정부에서 보장하겠다고 선언했다. 바이든은 13일 연설에서 은행의 어떠한 손실도 세금으로 해결하지 않겠다며 예금 보장 등에 필요한 돈은 시중 은행들이 예금보험기금(DIF)에 내는 돈으로 충당하겠다고 밝혔다.

미국 정부가 예금보험으로 보장하는 한도는 25만달러(약 3억2837만원)로 2008년에도 한도까지만 보장했다. 그러나 내년에 대선을 앞둔 바이든 정부는 이번 사태와 관련해 금융시스템에 위험이 발생할 때 예금 전액을 보호할 수 있다는 연방 은행법을 인용해 전액 보장에 나섰다. 이를 두고 세금으로 위기에 처한 기업을 돕는 '구제금융'이라는 비난이 커지고 있다.

미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의 피터 콘티 브라운 교수는 월스트리트저널(WSJ)을 통해 "이번 조치는 파산한 두 은행의 무보험 예금자들에 대한 구제금융과 같다"고 주장했다. 이어 "명백하게 25만달러 이상을 은행 계좌에 보관한 사람들과 기업들에게 혜택을 주고 있다"고 비난했다. 미 헤지펀드 시타델의 켄 그리핀 최고경영자(CEO)는 13일 인터뷰에서 "자본주의 경제 미국이 우리 눈앞에서 무너지고 있다"며 "정부가 예금자들을 모두 구제하면서 금융 규율이 훼손됐다"고 말했다.

해외에서도 시선이 곱지 않다. 한국과 미국 등 24개국이 참여하는 국제 금융규제 협의체인 금융안정위원회(FSB)는 2011년에 '금융회사의 효과적인 정리제도 핵심원칙'이라는 제도 개선 권고안을 마련했다. 권고안의 핵심은 은행의 손실을 세금으로 메우지 않고 주주와 채권자, 보장범위를 넘어서는 예금주에게 맡기는 것이다.

16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유럽 금융당국은 미국이 원칙을 깨면서 국제 규범까지 무시했다며 분개하고 있다. 익명의 유로존(유로 사용 20개국) 고위 관계자는 미 당국이 유럽과 "15년에 걸친 길고 지루한 회의"끝에 "총체적이고 완전한 무능을 보여줬다"고 비난했다.

■경기 침체 가능성 커져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16일 상원 청문회에서 "우리 은행 시스템은 건전하다고 재확인한다"며 "미국인들은 자신의 예금을 필요로 할 때 인출 가능하다는 것에 확신을 가져도 좋다고 약속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SVB에서 시작된 위기는 다른 중견은행인 퍼스트리퍼블릭은행으로 번지고 있다. 미 대형은행 11곳은 SVB 사태 직후 퍼스트리퍼블릭은행에서도 뱅크런 위기가 커지자 16일 약 39조원을 퍼스트리퍼블릭은행에 예치해 사태 수습에 나섰다. 퍼스트리퍼블릭은행의 주가는 유동성 확보에도 불구하고 17일 24% 폭락했으며 무디스를 비롯한 국제 신용평가사 3곳 모두 15~17일에 걸쳐 해당 은행의 신용등급을 강등했다.

미 경제매체 CNBC는 15일 SVB 사태로 미국의 경기 침체가 빨라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골드만삭스는 이날 중소은행들의 대출 축소와 금융권 불안 등을 고려해 올해 미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1.5%에서 1.2%로 내렸다. 골드만삭스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자산규모 2500억달러 미만의 중소은행들이 상업·산업 대출의 약 절반을 담당하고 있으며 주거용 부동산 대출의 60%, 상업용 부동산 대출의 80%를 맡고 있다. 동시에 소비자 대출의 약 45%가 중소은행들에서 나온다. 옐런은 16일 청문회에서 "우려되는 더 보편적인 문제는 압박 받은 은행들이 대출을 주저할 수 있다는 것"이라면서 "이 문제는 경제에 심각한 하방위험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15일 골드만삭스는 앞으로 1년 내 미국의 경기 침체 확률을 지난달 예측치(25%)에서 35%로 상향했다.
미 투자은행 웰스파고도 올해 미 경기 침체 확률을 55%에서 65%로 올려잡았다.

JP모건 역시 중소은행의 대출 둔화가 내년이나 2025년까지 미국의 GDP를 0.5∼1%p 감소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무디스 애널리틱스의 마크 잔디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올해 미국의 1·4분기 GDP 성장률이 1∼2% 수준이지만 2·4~3·4분기에는 0∼1% 성장률에 그치고 때에 따라 GDP가 감소할 수도 있다고 관측했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