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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 원하는건...69시간제 아닌 '저녁 있는 삶'

보건사회연구원 "1주일 희망 일하는 시간 36.70시간"
"韓, 여전히 장시간 노동국가"
휴가 가고 싶어도 대신 업무 맡을 사람 없어 눈치

근로자 원하는건...69시간제 아닌 '저녁 있는 삶'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17일 서울 성동구 KT&G 상상플래닛에서 열린 '고용노동부 제15기 정책기자단' 발대식에 참석해 있다.

[파이낸셜뉴스] "주 69시간제요? 꿈 같은 얘기죠. 요즘 MZ세대가 원하는 건 '저녁이 있는 삶'입니다."
한 중소기업에서 팀장으로 재직 중인 40대 A씨는 이같이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요즘은 많은 젊은 세대들이 '칼퇴'를 원하기 때문에 일이 남아 있어도 내일로 미뤄두고 집에 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결국 퇴근 시간 이후에는 팀원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아 자신이 일을 마무리 짓고 퇴근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A씨는 "요즘 젊은 세대들은 오후 6시 땡하면 퇴근해 일을 시키려고 해도 아무도 없다"며 "오전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을 원하는 이들에게 정부가 주 69시간을 제시했으니 화낼만 하다"고 말했다.

■희망 근무시간은 주 40시간보다 더 짧아
국민들이 실제로 희망하는 주간 근무시간은 오전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보다 더 짧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20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2년 전국 일-생활 균형 실태조사'(변수정 외) 결과에 따르면 취업자가 1주일에 희망하는 일하는 시간은 36.70시간이다. 상용근로자만 따지면 37.63시간 근무를 희망했다. 이번 조사는 지난해 9월20~10월7일 전국 만 19~59세 2만2000명(취업자 1만7510명·비취업자 449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에서 진행됐다.

임시·일용 근로자의 경우 사정에 따라 짧은 근무 시간을 선호하는 경우가 포함돼 희망 근무 시간이 32.36시간으로 더 짧았다.

특히 희망 근무 시간은 연령대가 내려갈수록 줄었다. 20대 이하(19~29세)는 34.92시간, 30대는 36.32시간이라고 답했다. 40대는 37.11시간, 50대는 37.91시간으로 상대적으로 길었다.

취업자가 실제로 근무하는 시간은 41시간으로, 현실과 희망 사이에는 4시간 넘게 차이가 났다.

근무시간이 길수록 희망 근무시간도 긴 편이었지만 주52시간 넘게 일하는 경우만 따져봐도 희망 근무시간은 평균 44.17시간으로 45시간을 넘지 않았다.

보고서는 "워라벨을 중요시하는 문화의 확산 등으로 일하는 시간이 줄어들고는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장시간 노동국가"라며 "희망하는 근로시간을 고려하면 일하는 시간에 대한 관리가 꾸준히 필요해 보인다"고 강조했다.

■주69시간에 청년들 '싸늘'
고용노동부는 이달 초 '일이 많을 때는 일주일에 최대 69시간까지 몰아서 하고, 일이 적을 때는 제주도 한달 살기 등 푹 쉴 수 있도록 하자'는 내용의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을 발표했다. 주 52시간제의 기본 틀은 유지하되 개별 기업의 사정에 따라 노사 합의를 거쳐 연장근로 단위를 '주' 외에 '월·분기·반기·연'으로도 운영할 수 있게 했다. 이 경우 연장근로 총량은 일정 비율로 줄어든다. 일하는 전체 시간은 지금보다 오히려 줄어드는 것이다.

정부는 주 69시간제가 청년들의 호응을 얻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여론은 싸늘했다. 만약 주 69시간을 일했는데 제대로 휴식을 보장받지 못하면 어떡하냐는 이유에서다. 현재 주 52시간제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현실도 불만의 불씨를 키웠다.

실제 이정식 고용부 장관이 지난주 개최한 2030자문단과 간담회에서는 '몰아서 일한 만큼 제대로 쉴 수 있는 제도가 엄격하게 시행될 것이라는 국민의 믿음을 얻어내는 것이 우선이다', '해당 부분이 개선이 된 상황에서 근로시간 개편을 진행해야 국민들도 수긍할 것' 등의 질타가 나왔다. 청년 19명으로 구성된 2030자문단은 정부에 청년 여론을 수렴 및 전달하고 정책에 대한 제언, 정책 참고사항 발굴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날 회의에서는 일이 많을 때는 근로시간을 늘리고, 적을 때는 쉴 수 있게 해주는 제도는 합리적이지만 지금도 포괄임금제가 널리 퍼져있는데 사장이 돈을 주겠냐는 걱정도 있었다.
일을 하면 돈을 받는다는 원칙이 바로 서는 게 먼저라는 의견도 나왔다.

또 휴가를 쓸 때 가장 눈치가 보이는 점은 대신 업무를 처리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인데, 연차휴가 활성화를 위해 대국민 휴가 사용 캠페인 홍보 뿐만 아니라 대체인력 등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 참석자는 "근로자의 의지가 아니라 회사에 의해 연장근로를 하게 될 것이므로 근로시간 선택권을 보장한다는 말이 와닿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honestly82@fnnews.com 김현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