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채에 대한 쏠림현상이 지난해에 비해 많이 완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작년에 32조7000억원의 사상 최대 영업손실을 기록한 한전을 바라보는 채권시장의 시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올해도 여전히 다른 공사채에 비해 높은 금리로 한전채가 발행되고 있다. 이는 한전채가 대량으로 풀리면서 AAA등급이 사실상 AA급 취급을 받고 있어서다. 디스카운트 된 한전채로 인해 AA급은 물론 A급 회사채의 설 자리가 좁아지고 전체 회사채 시장이 혼란을 겪고 있는 모양새다.
지난해, 한전은 연료비 폭등에 따른 도매가격 상승분을 전기요금에 제때 반영하지 못해 전기를 팔수록 적자가 커지는 상황에서, 부족한 전력구입비 정산, 기자재 및 건설 등 대금지급을 위해 2020년의 9배, 2021년의 3배가 넘는 전력채를 발행했다. 지난해 한전채 발행액은 37.2조원으로 이중 국내 발행액 35조원은 국내 회사채 발행액 76.8조원 대비 45.6% 수준을 기록하였다.
한전 적자의 불똥이 금융시장으로 튄 셈이다. 지난해 회사채 시장은 한전채에 휘둘렸다. 정부를 믿고 사는 초우량채권(AAA)이 높은 이자를 주니 돈이 빨려 들어간다. 회사채 수요의 블랙홀인 셈이다.
일각에서는 한전의 적자에 따른 대규모 회사채 발행이 채권시장 투자 수요를 흡수하고 금리를 상승시키는 등 채권시장을 왜곡시킨다고 지적한다. 신용등급이 낮은 중견 중소기업들이 채권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게 하고, 기업의 자금조달비용 증가와 투자 위축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전채로 인해 채권시장이 교란될 수도 있다는 지적은 이런 사유에서다.
한전은 부족자금을 대부분 한전채로 메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은행대출보다 싸게 조달할 수 있어서다. 한전도 은행차입 등 조달재원을 다양화하고 있으나, 대출은 금융시장 안정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한전에 자금을 빌려주기 위해 대규모 은행채를 발행 하면, 자금 수요가 한전채에서 은행채로 바뀌는 풍선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채발행이 차질을 빚을 경우 전력 구매대금, 기자재 및 공사대금 지급이 곤란해 한전의 재무위기가 전력산업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다. 현 정부의 주요 공약 중 하나인 원전 수출을 통한 원전 생태계 복원과 해외사업 수주 경쟁력에도 부정적이다.
결국 유일하고 근본적인 해법은 전기요금 정상화다. 국가 차원에서 전기요금 인상과 물가안정의 딜레마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자칫 시기를 놓쳐 버리면 회복 불가능한 금융시장 왜곡과 교란이 일어날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시장에서는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 SVB(실리콘밸리은행)나 CS(크레딧스위스) 사태에서 보여 주듯이, 예측가능한 위험이나 변수는 충격을 흡수할 수 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변수는 파급력이 어디로 향할지 얼마나 커질지 예측이 어렵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전의 재무은 더 악화될 것이다. 요금 인상이 지연되면 작년과 같은 한전채 쏠림 현상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고, 다시 채권시장 교란으로 이어질 것이다. 시장의 기대에 부응하는 신뢰를 보여줘야 할 때이다.
배광일 전남대 경영학부 교수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