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업계에서는 잊을 만하면 베끼기 논란이 터진다. 단골 레퍼토리는 우리 업체들이 일본의 과자를 그대로 모방해 팔고 있다는 것이다. '빼빼로(1983년 한국 출시)와 포키(1966년 일본)' '새우깡(1971년 한국)과 에비센(1964년 일본)' 등을 시작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유사제품이 거론돼 왔다.
다만 아무리 같은 맛의 과자라 해도 조금 다른 성분이 들어갔다면 베꼈다고 보기 힘들다고 보는 게 현 특허법이라고 한다. 업체들은 이런 사각을 이용해 "베낀 게 아니고 특정 일본 제품을 참고했다"는 입장을 보였고, 또 그런 불문율은 잘 통했다.
한국과 일본의 미투 제품(경쟁사의 주력상품을 본떠 만든 제품) 논란은 대부분 한국 측의 모방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요즘엔 상황이 묘하다. 반전의 주인공은 삼양식품의 불닭볶음면이다. 그것도 일본 인스턴트 라면을 처음 만든 업계 1위 닛신이 대놓고 베끼기에 나서면서다.
닛신은 최근 봉지라면인 '야키소바 볶음면 한국풍 아마카라'(달콤하고 매콤한) '닛신 까르보'와 컵라면 '야키소바 U.F.O 볶음면 진한 한국풍 아마카라 까르보' 등을 선보였다. 모두 삼양의 까르보붉닭볶음면을 노골적으로 베낀 미투 제품이다.
까르보불닭볶음면과 마찬가지로 닛신 까르보와 컵라면은 패키지 디자인에 연한 핑크색을 활용하고, 전면부에 '볶음면'이라는 한글까지 크게 써넣었다. 하단 왼쪽에는 캐릭터, 오른쪽에는 조리된 제품 이미지를 넣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 제품이 한국에서 수입된 불닭볶음면의 종류라고 오해하기 딱 좋다. 대형업체의 전략상품답게 벌써 이 제품들은 일본 전국 편의점과 마트, 유통점포에 쫙 깔렸다.
라면 종주국인 일본이 한국 제품을 따라했다는 것만으로도 격세지감이다. 6·25전쟁 후 식량 부족으로 허덕였던 1960년대 초 삼양이 우리나라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을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다름 아닌 닛신이었다.
하지만 닛신은 도와줄 수 없다며 단번에 거절했다. 이후 삼양은 닛신의 라이벌이던 묘조(명성)식품에서 기술을 무상으로 원조받았고, 결국 삼양라면을 탄생시켰다. 그랬던 삼양과 닛신의 입장이 60년이 지나 완전히 뒤바뀌었다.
일본에서 '국물 없는 매운라면'으로 새 시장을 개척한 삼양은 이런 상황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 삼양식품은 2019년 일본 현지에 삼양재팬을 설립했다. 지난해 일본 매출은 210억원으로 전년 대비 27% 늘었다. 몇 년 동안 경쟁자 없는 블루오션을 독주했는데, 이제는 닛신과 경쟁하게 됐다.
'베낀 것 아니냐'고 우리가 피해자로 권리 주장을 할 차례이지만 전적 때문인지 양심에 찔린다. 삼양은 일본에서 '붉닭볶음면'에 대한 상표권을 가지고 있지만, 동일한 상표를 쓴 것은 아니어서 이의를 제기해도 자국 기업인 닛신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크다. 일본도 그동안 우리의 '벤치마킹'을 봐 왔다. 불닭볶음면 이슈도 우리의 업보나 인과응보쯤으로 볼 수 있을까.
km@fnnews.com 김경민 도쿄특파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