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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일 칼럼] 정치인과 통화 녹음

[노동일 칼럼] 정치인과 통화 녹음
"우리나라에서는 이 법안이 가해자에게 훨씬 유리하게 적용될 텐데. 진짜 국민한테는 1도 관심이 없구나." "그럼 CCTV도 없애지. 동의받고 녹화하라고 그래. 정말 국민의 짐스러운 법안이다. 이딴 법안 만들 시간에 민생이나 더 살펴라." "학폭이나 직장 내 괴롭힘 녹취할 때도 가해자 놈들한테 '저 녹음 좀 할게요, 신고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해서요' 이러냐. 어이가 없네."

지난해 8월.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이 대표 발의한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 기사에 달린 댓글 중 '극히' 일부이다. 부적절한 표현도 일부러 그대로 인용했다. 날것 그대로의 여론을 느껴보라는 뜻이다. 개정안은 대화 당사자라도 상대방 동의 없이는 통화나 대화 녹음을 금지하는 내용이다. 현행법은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의 대화' 녹음을 불법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대화(통화) 당사자가 녹음하는 것은 상대 동의가 없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윤 의원은 "당사자 간의 대화를 녹음해 협박 등 악용하는 사례가 빈번해지고 있다"면서 이는 "대화자 일방의 사생활의 자유 또는 통신 비밀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을 제안 이유로 들었다. 조지프 터로 교수의 책 '보이스 캐처'를 인용, "음성인식 기술은 목소리 톤으로 감정이나 성격을 추론하고, 나아가 그 사람이 앓는 질병부터 나이, 인종, 교육 및 소득까지 유추하는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다"며 "비밀녹음은 미래에 '생체정보 유출 문제'로까지 비화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도 했다.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지만 실제 속내는 달라 보인다. 녹음 내용이 공개되면서 논란이 된 여러 사건을 염두에 둔 게 아닌가 싶다. 윤 의원 자신이 2016년 당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를 비난하는 통화 녹취가 공개돼 파문이 일자 탈당하는 등 곤욕을 치른 전력이 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대선 예비후보이던 원희룡 전 지사와의 통화 녹취록을 공개한 일이나, 권성동 원내대표와 윤석열 대통령의 "내부 총질 당 대표" 문자 노출 사건 등으로 "우리 정치가 유치찬란해진다"는 이유를 들어 개정안을 지지한 사람도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의 녹취파일 쓰나미가 몰려오는 중이다. 2021년 전당대회에서 '돈봉투'가 뿌려진 증거가 연일 공개되면서 민주당은 수사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전전긍긍하고 있다. "형님, 우리도 주세요." "오빠, 하려면 다 해야지." 전가의 보도인 '야당 탄압' 주장은 녹취록을 통해 들리는 생생한 목소리 앞에서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묵묵부답이 장기인 이재명 대표가 공개 사과한 것은 사태의 심각성을 웅변한다. 그러고 보니 반대 여론을 접한 윤 의원이 법안을 철회한 것은 천만다행이다. 그대로 추진했다면 여야 할 것 없이 호응을 얻어 입법화될 게 분명한 법이었다. 녹음 증거가 아니었으면 민주당은 여전히 '조작 수사'를 외칠 것이다. '유치찬란' 정도가 아니라 썩어 빠진 정치권의 실상을 드러내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을 게 뻔하다. 이 전 부총장의 녹취파일은 3만여개, 범죄 혐의가 있는 것만 2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토록 녹음에 집착한 이유를 알 수는 없다. 그만큼 정치권의 검은 속을 정치인들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라 짐작할 따름이다. 이쯤 되면 정치인들의 통화 녹음은 금지가 아니라 오히려 장려할 일이 아닌가 싶다.

dinoh7869@fnnews.com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