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조선전기에 세종의 명에 의해 편찬된 <향약집성방(1433년)>과 <세종실록(1418년~1450년)>.
때는 조선 전기, 1431년 세종대왕이 집권하는 시대였다. 세종은 집현전과 내의원 학자들에게 의서를 편찬할 것을 명했다. “조선 땅에서 나는 향약으로 백성을 치료할 수 있는 의서를 편찬하도록 하라”라고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국 의서에서 부르는 약초명과 조선의 백성들이 부르는 향약(鄕藥) 명이 서로 달라서 정리할 필요성이 절대적이었다. 이미 시골 마을에서는 향약으로 많은 병을 고치고 있었던 터였다. 이러한 내용을 잘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되돌려 준다면 무엇보다 중국에서 약초를 비싼 값을 주고 수입하지 않아도 되기에 절실했다.
세종은 먼저 의관들을 선발해서 사신들을 따라서 북경으로 보냈다. 그래서 당시 북경에서 구할 수 있는 중국의 의서들을 모두 구해 와서 정리하도록 명했다. 특히 중국의 약초명과 조선의 향약명이 서로 다른 오류를 바로 잡아서 매번 보고를 하도록 명했다. 의관들은 세종이 불쑥불쑥 내의원(內醫院)으로 행차를 해서 게으름을 피울 수도 없었다. 세종의 관심은 그만큼 각별했다.
1431년 가을, 집현전 학자인 유효통, 전의감(典醫監)의 노중례와 박윤덕을 주축으로 해서 중국의 의서와 조선에서 출간된 방서를 모두 빠짐없이 모아서 증상과 치료별로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집현전은 궁중에 있는 조선 최고의 학문 연구기관이었고, 전의감은 의약의 공급과 임금이 하사하는 의약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던 관서다.
1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제법 많은 양의 방제와 증례가 모였다. 이전에 출간되었던 '향약제생집성방'의 증례, 처방 그리고 침구법들이 수배에서 수십배가 늘었다. 학자들은 이것을 모두 모아서 본초와 향약의 정리, 약제들의 포제법(炮製法)을 첨부하여 모두 85권을 만들어 세종에서 올렸다.
세종은 신하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직접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라 명명하고, 책으로 엮어 간행하도록 명했다. 그런데 아직 미완성이었다. 아직 서문이 없었던 것이다. 세종은 집현전 학자인 신하 권채(權採)에게 명하여 서문을 쓰게 하였다. 권채는 당시 세종의 스승으로 당대 최고의 문장가 중 한 명이었고 세종의 총애를 받은 신하였다.
그런데 집현전 학자들은 권채가 서문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술렁거렸다. 몇 년 전 권채는 여종을 학대해서 죄를 지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명이기에 누구도 거역할 수 없었고, 권채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서문을 썼다.
권채의 서문을 보면 “.... 저 권채가 간절히 생각건대, 임금의 도는 인(仁)보다 큰 것이 없고 인도(仁道)가 지극히 큼에 또한 얼마나 많은 종류가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 주상전하께서 성대한 덕으로 지극한 정치를 펴서 자리를 지켜 정사를 발(發)함에 인도(仁道)의 큰 것을 온전히 체득하시어 의약으로 백성을 구제하는 일과 같은데, 이르러서도 정성스러움을 이와 같이 하시니 어진 정치의 본말(本末)과 크고 작은 것이 모두 극진해서 빠진 것이 없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선덕(宣德) 8년(1433년) 6월 통정대부 성균관 대사성 직수문 전지제 교 신하 권채는 삼가 서문을 씁니다.”라는 식의 내용이었다.
권채가 쓴 서문을 보면 ‘인(仁)’이란 단어가 나온다. 인(仁)은 어질다는 말이다. 권채는 서문에서 당연히 주상인 세종이 인(仁)하고, 세종이 어진 길인 인도(仁道)를 행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겠지만, 권채의 붓끝에서 인(仁)이란 단어가 쓰여졌다는 것에 대해 신하들은 혀를 끌끌 차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로부터 6년 전의 이야기다. 당시 형조판서 노한(盧閈)은 길을 가다가 우연히 한 노복이 어떤 물건을 지고 가는 것을 보았다. 언뜻 보니 등에 이고 있는 짐은 사람의 형상을 띠었고 가죽과 살은 모두 말라 살에 붙어 있었으며 마치 미라와 같았다.
노한은 깜짝 놀라 물었다. “지금 등에 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노복은 “집현전 응교 권채의 가비(家婢)입니다.”라고 했다.
노한은 다시 “아니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냐? 이것은 이미 오래전에 죽은 것 같은데, 사실대로 고하라?”라고 호통을 쳤다.
노복은 권채의 후한이 두려웠지만, 권채보다 권세가 높아 보이는 관리가 묻기에 벌벌 떨며 사실대로 말했다.
“권채 대감은 이 여종이 도망한 것을 미워하여 광에 가둬서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라고 답했다. 노한은 ‘권채가 어찌 이토록 잔인할 수 있을까?’하고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노한은 길에서 본 사건을 세종에게 고했다. 사실 권채는 세종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기에, 권채의 실체에 대해 반드시 고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형조에서 이미 조사를 시작했지만 방해가 심해서 조사를 마무리하지 못해 미처 계달(啓達)하지 못했다고 했다.
세종은 “나는 권채가 품성이 편안하고 세심한 배려를 하는 사람으로 여겼는데, 그가 그렇게 잔인했더란 말이냐. 반드시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된 것인지 끝까지 조사하여 고하도록 하라.”라고 명했다.
의금부에서는 왕의 명을 받아 다시 조사를 시작했다. 그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1427년 경, 집현전 학자인 권채는 일찍이 여종 덕금을 첩으로 삼고 있었다. 덕금은 어느 날 병든 조모를 문안하고자 하여 휴가를 청했다. 권채는 허락하는 듯했으나, 권채의 아내 정씨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덕금은 조모가 위독하다니 잠시 다녀올 요량으로 집을 나섰다.
“덕금이 있느냐?”라고 정씨 부인이 덕금을 찾았다. 그러나 덕금이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정씨는 몰래 집을 나선 덕금이 괘씸하다 여기고 대감에게 “덕금이가 방금 전 다른 남자와 간통하고자 하여 도망갔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부인 정씨는 덕금이 첩인 것에 질투심이 있었고 항상 미웠던 것이다. 덕금이 돌아오자 권채는 부인이 시키는 대로 덕금의 머리털을 자르고 매질을 했다. 그리고 왼쪽 발목에는 고랑을 채워서 광 속에 가뒀다. 자초지종도 없이 당하는 터라 덕금은 뭐라 변명도 못했다.
부인 정씨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덕금을 죽여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밤 정씨가 부엌에서 식칼을 가지고 와서 광에 들어가려고 하자, 여종 녹비가 부인을 막아서며 “마님, 만약 덕금이의 목 베신다면 여러 사람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럼 마님은 살인자라는 오명 쓰게 됩니다. 그러니 고통을 주어 저절로 죽게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덕금은 그날 죽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 덕금은 발목에 쇠사슬이 채워져 있어서 밖을 나올 수가 없었고, 대소변은 어떨 수 없이 광의 구석에서 해결해야 했다. 부인 정씨는 물과 음식은 죽지 않을 정도로만 주면서 핍박했다. 심지어 덕금이 싸 놓은 오줌과 똥을 먹게 했다. 한번은 덕금이 똥에 구더기가 생겨 먹지 않으려 하자 정씨는 침으로 덕금의 항문을 찔렀다. 온 집안에 덕금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덕금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똥과 구더기까지 억지로 삼켰다.
부인 정씨의 침학(侵虐)은 수개월 동안 이어졌고, 그 잔인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권채는 이를 익히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었다. 덕금은 결국 고문을 당하면서 거의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죽었다. 그러자 죽은 덕금을 노복이 등에 지고 묻으러 가다가 길에서 형조판서를 만난 것이다.
의금부에서는 이와 같은 조사결과를 왕에게 고하면서 “원컨대, 권채의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그 부인 정씨와 함께 모두 잡아 와서 국문(鞫問)하여 징계할 것입니다. 형률에 의거하면 권채는 곤장 80대, 부인 정씨는 곤장 90에 해당합니다. 윤허하여 주시옵서서.”라고 고했다.
그러자 세종은 “그들의 잔인 포학함이 이 정도니 어떻게 그를 용서하겠는가. 그렇게 하도록 하라.”라고 하면서 윤허했다.
그러나 의금부에 끌려온 권채는 자신은 모르는 일이고 모두 부인이 자행한 일이라고 하면서 변명으로 일관했다. 덕금의 고문을 부인 정씨가 주도했다고 하지만 권채 또한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권채는 집현전 동료 학자들에게 탄원서를 올려 자신의 죄를 감해 줄 것을 요청하도록 부탁까지 했다. 세종은 결국 권채의 관직을 박탈하는 선에서 죄를 가볍게 묻고, 부인 정씨는 곤장을 때리도록 했고 정씨는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그런데 권채는 얼마 후 다시 관직에 복직했다. 관직박탈 또한 없던 일이 된 것이다. 조선 최고의 성군(聖君)이라고 칭송되는 세종이 잔인한 사건에 연루된 권채를 다시 복직시켰다는 것을 보면 그만큼 그를 특별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세종은 권채에게 '향약집성방'의 서문까지 쓰도록 명했다.
신하들은 ‘권채는 글을 배울 줄은 알아도 부끄러움은 알지 못한다’고 수근거렸다. 권채가 서문에서 인(仁)이란 단어를 쓴 것은 어쩌면 자신에게 죄를 가볍게 물었던 세종의 인자함을 의미했는지도 모른다. 권채는 서문을 쓴 이후 4년 후, 만 40세의 나이로 죽었다.
* 제목의 ○○은 권채(權採)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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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序. 전략. 臣採切念컨대 君上之道는 莫大於仁하고 而仁道至大에 亦有幾多般乎아 今我主上殿下가 以盛 德으로 興至治하사 守位發政에 全體此道之大하사 至如醫藥濟民之事히 拳拳若此하시니 可見仁政本末巨細가 兼盡而無遺矣라. 중략. 宣德八年六月 日通政大夫 成均大司成 直修文殿知製 敎 臣 權採는 謹序하노라. (향약집성방 서문. 전략. 저 권채가 간절히 생각건대, 임금의 도는 인보다 큰 것이 없고 인도가 지극히 큼에 또한 얼마나 많은 종류가 있는가? 지금 우리 주상전하께서 성대한 덕으로 지극한 정치를 펴서 자리를 지켜 정사를 발함에 인도의 큰 것을 온전히 체득하시어 의약으로 백성을 구제하는 일과 같은데 이르러서도 정성스러움을 이와 같이 하시니 어진 정치의 본말과 크고 작은 것이 모두 극진해서 빠진 것이 없음을 알 수가 있다. 중략. 선덕 8년 1433년6월 일 통정대부 성균관 대사성 직수문 전지제 교 신하 권채는 삼가 서문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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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세종9년·1427년)> 刑曹判書盧閈啓曰: “臣路見一僕負一物, 稍似人形, 而皮骨相連, 憔悴莫比, 駭而問之, 曰: 集賢殿應敎權採家婢也. 採疾其逃亡囚之, 以至於此。 本曹覈之未畢, 未卽啓達, 其殘忍之甚, 不可勝言.” 上曰: “予以權採爲安詳人也, 其殘忍如是乎? 此必受制於妻而然也, 須窮覈之.” (형조판서 노한이 계하기를, “신이 길에서 한 노복이 무슨 물건을 지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사람의 형용과 비슷은 하나 가죽과 뼈가 서로 붙어 파리하기가 비할 데 없으므로 놀라서 물으니, 집현전 응교 권채의 가비인데, 권채가 그의 도망한 것을 미워하여 가두어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본조에서 이를 조사했으나 마치지 못하여 즉시 계달하지 못했사오니, 그의 잔인이 심한 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겠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권채를 성질이 안존하고 자세한 사람으로 여겼는데, 그가 그렇게 잔인했던가. 이것은 반드시 그 아내에게 제어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니 모름지기 끝까지 조사하라.”라고 하였다.)
刑曹啓: “集賢殿應敎權採, 曾以其婢德金作妾, 婢欲覲病祖母, 請暇不得而潛往. 採妻鄭氏訴於採曰: 德金欲姦他夫逃去. 採斷髮榜掠, 加杻左足, 囚于房中. 鄭礪劍擬斷其頭, 有婢祿非者曰: 若斬之, 衆必共知, 不如困苦, 自至於死. 鄭從之, 損其飮食, 逼令自喫溲便, 溲便至有生蛆, 德金不肯, 乃以針刺肛門, 德金不耐其苦, 幷蛆强呑, 數月侵虐. 其殘忍至於此極, 乞收採職牒, 與其妻幷拿來, 鞫問懲.” 依允而以判府事卞季良, 提學尹淮, 摠制申檣之啓, 遂改命除收職牒, 下義禁府鞫. (형조에서 계하기를, “집현전 응교 권채는 일찍이 그 여종 덕금을 첩으로 삼았는데 여종이 병든 조모를 문안하고자 하여 휴가를 청하여 얻지 못하였는데도 몰래 갔으므로, 권채의 아내 정씨가 권채에게 호소하기를, ‘덕금이 다른 남자와 간통하고자 하여 도망해 갔습니다.’하니, 권채가 여종의 머리털을 자르고 매질하고는 왼쪽 발에 고랑을 채워서 방 속에 가두어 두고 정씨가 칼을 갈아서 그 머리를 베려고 견주니 여종 녹비란 자가 말하기를, ‘만약 이를 목 벤다면 여러 사람이 반드시 함께 알게 될 것이니, 고통을 주어 저절로 죽게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하므로, 정씨가 그 말대로 음식을 줄이고 핍박하여 스스로 오줌과 똥을 먹게 했더니, 오줌과 똥에 구더기가 생기게 되므로 덕금이 먹지 않으려 하자 이에 침으로 항문을 찔러 덕금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구더기까지 억지로 삼키는 등, 수개월 동안 침학하였으니, 그의 잔인함이 이 지경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원컨대 권채의 직첩을 회수하고 그 아내와 함께 모두 잡아와서 국문하여 징계할 것입니다.”하니 그대로 윤허했는데, 판부사 변계량, 제학 윤회, 총제 신장의 계에 의하여, 드디어 고쳐 명령하여 직첩은 회수하지 말게 하고 의금부에 내리어 국문하도록 하였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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