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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하의 본초여담] 정약전이 지은 ‘자산어보’는 어느 섬 집의 OO로 사용되었다

[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한동하의 본초여담] 정약전이 지은 ‘자산어보’는 어느 섬 집의 OO로 사용되었다
조선 후기 정약전이 흑산도 유배지에서 지은 <자산어보(玆山魚譜, 1814년)>의 표지(왼쪽)와 서문의 일부.


때는 조선 후기, 1801년에 천주교를 탄압한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정약전은 천주교를 믿고 포교를 했다는 이유로 남쪽 끝에 있는 섬인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이에 함께 연루된 동생 정약용 또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이 둘은 그나마 참형을 면한 것이 다행이었다.

정약전은 암담했다. 흑산도(黑山島)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조차 없었다. 이름도 검은 산이라니 불길한 느낌마저 있었다. 그래서 유배지에 도착해서 가족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는 흑산(黑山)이란 이름 대신 자산(玆山)이란 이름으로 대신했다. 자(玆) 또한 검다는 뜻이기 때문에 흑산과 서로 뜻이 통했다. 자산이라고 하니 그나마 암담함이 덜 했다.

정약전은 시간이 될 때마다 바닷가에 나가서 산책을 했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나마 답답한 마음이 풀렸다. 게다가 서학(西學)을 공부했기에 바다 저편의 문명이 더욱더 궁금함과 애틋함으로 다가왔다.

어느 날도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바닷가에 나갔다. 바닷가에는 많은 크고 많은 고깃배들이 드나들었다. 빈 배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배는 모두 만선으로 엄청난 양의 물고기들을 잡아 왔다.

정약전이 한 어부에게 물었다. “이 물고기 이름은 뭐요?”
그러자 어부는 “물괴기 이름은 모르겄지만 맛이 달달하고 맛있응게 탕으로 끊이면 일품이지라.”라고 하는 것이다.

정약전은 “아니 오랫동안 어부 일을 했으면서 맨날 잡는 물고기의 이름도 모른단 말이요?”라고 물었다.

그러나 그 어부는 “아따매 괴기 이름이 뭐땀시 필요하다요. 우리는 그냥 간재미라고 헌디, 그냥 잡아서 묵거나 시장에서 팔문 그만잉게라.”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자 정약전은 “저쪽 어부는 다른 물고기를 보고 간재미라고 하던데 말이요?”라고 의아해야 했다.

간재미는 가자미를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고 동시에 홍어를 부르는 전라도 사투리다. 이렇듯 이름들이 서로 섞여 있었다.

다른 어부들에게 물어봐도 생선 이름을 정확하게 아는 이들이 드물었다. 정약전은 평소에 궁금함을 참지 못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귀양살이 동안에 중구난방으로 정리되지 않은 바다 물고기의 족보를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정약전은 동생 정약용에게 편지를 쓰면서 물고기의 그림과 설명을 함께 보냈다.

그러면서 “이곳에서 어류족보를 만들어 볼 생각이네. 내가 보니 처음 보는 물고기들이 많아 이것을 이렇게 그림으로 그리고 동시에 글로 설명을 한다면 좋을 것 같네.”라고 했다.

그랬더니 정약용은 “형님, 문자가 단청(丹靑)보다 나은 법입니다. 그림이라는 것이 제대로 그리지 않으면 한눈에 보기에는 좋으나 실제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를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림은 빼고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서술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자산어보가 기존의 의서나 서적에도 볼 수 없는 사실적으로 자세하게 설명된 이유는 이와 같은 정약용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림까지 더해졌다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당시 조선후기에는 사실주의 화풍으로 많은 화가들이 그림을 마치 사진처럼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그림을 덧붙이고자 했더라도 그 장소가 흑산도였기에 제대로 변변한 화가를 불러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정약전은 붓을 들고 날마다 바닷가에 나가서 어부들에게 물고기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나 어부들이 같은 물고기를 부르는 이름이 모두 달랐다. 심지어 사투리들이 많아서 정확하게 문자로 쓰는 것도 애를 먹었다. 그래서 정약전은 붓을 멈추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늙은 어부가 “정 궁금허믄 창대한테 물어보슈”라고 하는 것이다.

마을에는 창대(昌大)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성은 장(張)씨며 자는 덕순(德順)이었다. 자(字)가 있는 것을 보면 양반가 자손인 것을 같지만 창대의 집은 가난했다.

정약전은 창대의 집을 찾았다. 창대는 집안에 틀어박혀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책읽기를 좋아했는데, 읽을 만한 책이 적어서 몇 권을 번갈아 가면서 읽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창대가 읽고 있는 '소학(小學)'이나 '논어(論語)'들은 손때가 묻어 너덜너덜해질 지경이었다.

창대는 성품은 조용하고 치밀한 성격이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섬 밖을 나가본 적이 없어 견문은 박식하지 못했지만 총명했다. 한번 본 초목(草木)과 섬 곳곳의 어류(魚類)를 세세하게 관찰하고 사고했으며 한번 보거나 들었던 것들은 결코 잊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말이라면 가히 사실로 믿을 만했다.

정약전은 창대에게 “자네가 나를 좀 도와줘야겠네. 섬사람들이 부르는 이름과 설명이 천차만별이라 붓의 먹물이 말라버리기 일쑤네. 모두들 자네한테 물어보라고 하니 부탁하네.”라고 했다.

창대도 흥미가 있었는지, “아따 그 귀한 책을 없는 내용으로 새로 만드신 당게 대단하시구만요.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구만이라.”라고 답했다.

정약전은 창대를 집으로 불러서 숙식을 함께 하며 머무르게 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함께 바닷가로 나가 어부들이 잡은 물고기를 살폈고. 창대가 젓는 배를 타고 직접 낚시도 하고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잡아서 관찰했다. 창대와 같은 명석한 친구가 옆에 있으니 헷갈리는 법이 없었고 차곡차곡 어류의 족보가 쌓였다.

정약전은 정리한 내용을 3권으로 나눠서 비늘이 있는 물고기, 비늘이 없는 물고기, 그리고 잡다한 바다생물 등으로 구성했다. 창대와 함께 정리를 마친 후 서문을 적었다.

“이 책은 바다의 어류와 해초를 곁들어서 바다의 어류와 해초를 아울렀으니 후세사람들이 고증과 경험에 자료로 활용되었으면 한다. 이 책은 병을 치료하고 이용함에 이치에 맞게 활용하게 하고 여러사람들이 마땅히 응용함에 있어 자료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산어보를 지은 이유를 적었다.

서문을 보면 결코 시간이 남아 돌아서 저술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서문을 쓰고 난 정약전은 책의 이름을 '자산어보(玆山魚譜)'라고 지었다. 그런데 책은 단 한권 밖에 없었다. 정약전은 너무 심혈을 기울인 나머지 한 권 더 필사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창대 또한 자산어보가 완성된 후 학문에 뜻을 두고 육지로 나간 지 오래되었다. 안타깝게도 자산어보의 유일한 초고(礎稿)이자 완성본은 방안 한 구석에서 먼지가 쌓이고 있었다.

동생 정약용은 이미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저술하고 있었고 완성이 되었다는 것을 편지를 통해서 알고 있었는데, 완성되었다고 했던 책을 받아 보지 못해 의아해 했다. 정약전이 죽은 후 정약용은 제자 이청(李𤲟)과 함께 흑산도를 방문할 일이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형님이 저술한 자산어보 책장이 흑산도 어느 섬 집의 벽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어부는 이 책이 자신의 섬에 유배를 왔던 정약전의 저술인지도 몰랐던 것이다.

정약용은 이 상황을 슬퍼하며 제자 이청(李𤲟)에게 벽지로 사용된 자산어보 종이를 잘 뜯어내고, 뜯어지지 않는 것들까지 해서 모두 필사를 하게 했다. 이청은 당시에 정약용과 함께 본초강목이나 동의보감을 함께 공부해서 의원만큼이나 본초에 대한 식견이 높았다.

이청이 읽어보니 자산어보는 해양 어류의 곁모양, 내부장기 모습, 먹이 습관과 생태, 사람들이 먹는 방법 등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감탄을 했다. 그런데 이미 기존 학자들에 의해서 익히 밝혀진 내용들이 누락되어 있기도 했다. 그래서 이청은 '본초강목'이나 '동의보감' 등의 내용을 추가했다.

이청은 처음으로 기록된 민어나 조기 등을 적을 석수어(石首魚) 편을 시작으로 해서 한자 한자 빠짐없이 필사했다. “큰 것은 길이가 1장(丈) 정도 되고 몸통은 한 뼘 정도나 되는 것도 있어서 대면(大鮸)이라고 부른다. 속명으로 ‘애우치’라고 한다.....”라고 빠짐없이 적었다.

그리고 말미에 ‘청안(𤲟案)’이라고 덧붙이고 나서 기존 의서의 내용을 추가했다. “청(𤲟)이 고찰하니, 정자통(正字通)에 의하면 석수어는 일면 민어(民魚)라고 하며....” 또한 “본초강목에 의하면 상어(鯗魚)라 함은 석수어를 말린 것을 말하며 사람의 건강에 좋은 식품이라고 해서 양(養)자가 상(鯗)자로 발전했다고 했다. 동의보감에는 회어(鮰魚)를 민어(民魚)라고 기록하고 있다. 진장기(陳藏器)에 의하면 외(鮠)를 면(鮸)이라고 잘못 전하고 있는데....”라고 보충했다.

'정자통'은 명나라 때 장자열의 저술이며, '본초강목'은 명나라때 이시진의 본초서이고, '동의보감'은 조선의 허준의 의서다. 진장기는 당나라 때 '본초습유'를 저술한 이다. 이청은 당시로서 참고할 만한 서적의 내용을 모두 덧붙여서 '자산어보'의 가치와 위엄을 더 했다.

이청은 필사를 하면서도 당시까지 저술된 기존 서적에도 없는 항목들이 많아서 깜짝 놀랐다. ‘정약전 선생님은 보통 분이 아니시구나. 기존의 내용을 답습한 것이 아니라 없는 내용까지 모두 새롭게 담고 있음이 놀라울 따름이다.’라고 되뇌면서 필사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렇게 해서 결국 '자산어보'는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정약전의 붓글씨 필체는 아니지만, 그나마 필사본이라도 다행이었다. 자칫 '자산어보'는 어느 흑산도 섬 집의 벽지 속으로 감춰져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기 때문이다.

* 제목의 ○○은 ‘벽지’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 자산어보(茲山魚譜)> 茲山者, 黑山也, 餘謫黑山, 黑山之名, 幽晦可怖, 家人書牘, 輒稱茲山, 茲亦黑也, 茲山海中, 魚族極繁, 而知名者鮮, 博物者, 所宜案也, 餘乃博訪於島人, 意欲成譜, 而人各異言, 莫可適從, 島中, 有張德順, 昌大者, 杜門謝客, 篤好古書, 顧家貧少書, 手不釋卷, 而所見者, 不能博, 然性恬靜精密, 凡草木島魚, 接於耳目者, 皆細察而沈思, 得其性理, 故其言爲可信, 余遂遨而館之, 與之講究, 序次成編名之, 曰茲山魚譜, 㫄及於海禽, 海菜, 以資後人之考驗, 顧余固陋, 或已見本草, 而不聞其名, 或舊無其名, 而無所可考者, 太半也, 只憑俗呼, 俚不堪讀者, 輙敢創立其名, 後之君子, 因是而修潤之, 則是書也, 於治病, 利用理, 則數家, 固應有資, 而亦以稱, 詩人博, 依之所, 不及云爾. 嘉慶甲戍, 洌水, 丁銓, 著. (자산은 흑산이다. 나는 흑산도에 유배를 왔는데, 흑산의 이름은 아득하게 멀고 어두운 느낌이어서 집안 사람들은 편지에 문득 자산이라고 불렀다. 자(玆) 역시 검다는 의미다. 자산바다에는 어족이 아주 풍성했는데, 그 이름을 아는 자가 드물었다. 사물에 밝은 자라면 마땅히 살펴봐야 한다. 나는 이내 섬사람들을 두루 방문하여 어류의 족보를 만들어보고자 하였으나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 각기 달라서 가히 적절히 따를 수 없었다. 섬에는 장덕순, 창대라는 이가 있었으니 집안에만 틀어박혀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오로지 고서만을 좋아했으나 생각건대 집은 가난하고 책은 적었음에도 손에서 책을 놓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견문은 능히 박식하지 못했다. 그래도 성품은 조용하고 치밀한 성격이어서 무릇 초목과 섬의 어류를 듣거나 보면 모두 세세하게 관찰하고 사고가 깊고 그 사물의 성정과 이치를 얻은 까닭에 그의 말이라면 가히 믿을 수 있었다. 나는 그를 불러 놀면서 집에 머무르게 하고 함께 해석하고 연구하여 서문과 목차, 편명을 지은바 이름하여 자산어보라고 지었다. 곁들어서 바다의 어류와 해초를 아우렀으니 후세사람들이 고증과 경험에 자료로 활용되었으면 한다. 생각건대 나는 견문이 적어 혹은 이미 본초서에서 본 것도 있겠고 이름을 들어 보지 못한 것도 있고, 예로부터 부르는 이름이 없어서 가히 고찰할 수 없었던 것이 태반이었다. 단지 세속에서 부르는 이름과 속된 이름으로 차마 읽을 수 없는 것들은 과감히 그 이름을 새롭게 지었다.
후세의 군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고치고 다듬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병을 치료하고 이용함에 이치에 맞게 활용하게 하고 여러 사람들이 마땅히 응용함에 있어 자료가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박학다식한 지성인들에게는 의지하는 바 미쳐 이르지 못한 부분까지 넓힐 수 있게 할 것이다. 가경 갑술년(1814년) 열수 정약전 저술함.)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