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가 발생한 사고에서 가해자의 책임보험 한도액이 피해자의 손해를 모두 합친 금액에 미치지 못한다면 피해자 보험금 청구권이 보험사 구상권보다 먼저라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대법관 조재연)는 화재 보험사인 A사가 화재 가해 기업 측이 계약을 맺은 책임보험사 B·C사를 상대로 낸 구상금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인천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2일 밝혔다.
지난 2018년 4월 13일 인천 서구 일대의 한 화학물질 처리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이로 인해 같은 공단에 입주한 회사 몇 곳이 피해를 봤다. 당시 추산된 피해 규모는 약 23억원으로, 화재가 난 공장을 운영한 업체는 B, C사를 비롯한 3개 보험사에 각 3억원 한도의 책임보험에 가입된 상태였다.
피해 업체들의 보험사인 A사는 피해 업체들에게 1억3000만원을 우선 지급한 뒤 화재가 난 공장 측 보험사들을 상대로 구상금을 청구했다. 그런데 B사와 C사 역시 다른 피해 업체들을 가입자로 하고 있어 각각 16억원과 3억원의 보험금을 지급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가해자 측이면서 피해자 측이라는 이중의 지위를 가진 B, C사는 '채권과 채무가 동일한 주체에 귀속한 때 채권이 소멸된다'고 명시된 민법 제507호를 내세워 자신들의 보험금 지급 의무가 소멸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1심과 2심은 A사 손을 들어줬다. 하급심은 "피고들(B, C사)가 다른 피해자들에게 보험금을 지급해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채권을 대위 취득했어도 A사에 대한 책임보험금을 지급할 의무가 혼동으로 소멸됐다고 볼 수 없다"고 봤다.
그러나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피해자가 직접 배상을 청구하는 경우를 먼저 따져봤어야 한다는 것이 대법원 판단이다.
만약 B사와 C사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손해보험자와 책임보험자가 동일인이라는 우연한 사정 때문에 이들이 사실상 우선변제를 받게 되는 결과가 되는데, 이는 피해자 보호를 위한 직접청구권 및 책임보험 제도 취지에 맞지 않다고 볼 여지가 있다는 것이 대법원 판단이다.
대법원은 "책임보험 한도액이 다수 피해자의 손해 합계액에 미치지 못해 피해자의 직접청구권과 화재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한 후 보험자대위로 취득한 직접청구권이 경합하는 경우 원칙적으로 피해자의 직접청구권이 우선한다"고 판시했다.
A사나 B, C사 모두 이미 지급한 보험금에 따른 구상권을 내세우지만, 피해 전부를 보전받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피해자가 직접 책임보험금을 받을 권리를 먼저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다.
대법원은 "이 사건 청구의 정당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직접청구권을 행사한 피해자들의 손해액과 원고와 피고가 직접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를 심리해야 한다"며 파기환송했다.
yjjoe@fnnews.com 조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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