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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시선] 외교분야에서 시작된 '불씨'

[강남시선] 외교분야에서 시작된 '불씨'
혹시나 해서 재를 뒤적였다. 불 꺼진 화로가 자신의 처지와 같다는 생각에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바로 그때. 흐릿하게 불씨가 보였다. 재 밑에 숨은 불씨를 찾아내 후후 바람을 불었다. 불 꺼진 화로 밑바닥에서 겨우 건진 불씨를 드디어 살렸다. 가마 안이 소란스럽자 번주의 안위가 걱정된 부하들이 달려왔다. 불씨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했다. 마을을 다시 번창하게 살릴 '희망의 불씨'라는 말을 꼭 전하라고 당부하며.

250여년 전 파산 직전의 우에스기 가문을 살려낸 한 지도자의 일본 실화소설 '불씨'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 지도자의 이름은 우에스기 요잔.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일본인으로 꼽으며 오히려 일본 국민에게 본격 알려지기도 했다. 주인공은 10대의 나이에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요네자와 번에 번주로 부임하게 된다. 가마 안의 불씨를 살린 것에 영감을 받아 '망해가는 번을 살리는 하나의 불씨가 되겠다'고 다짐하며 개혁에 앞장선다. 그는 개혁을 '반대자들을 몰아내는 것이 아닌 구성원들의 의식을 바꾸며 동시에 그들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솔선수범해 근검절약하는 것은 물론 무사들에게도 뽕나무, 닥나무를 심게 하고 가신의 아내들에게는 양잠과 직물 기술을 습득하게 한다. 결국 요네자와는 가장 부유한 번으로 재탄생했으며 지금도 최고급 비단 생산지로 유명하다.

지난 1983년 출간된 '불씨'는 1989년 NHK 대하사극으로 제작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90년 초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됐으며 첫 문민정부로 개혁을 내세운 김영삼 정부에서 청와대 직원들에게 직접 책을 돌릴 정도로 국내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12년 만에 한일 셔틀외교가 복원되면서 이제 칼럼에 일본 역사를 거론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절이 왔다. 죽창가를 외치고 불매운동까지 벌어지던 것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일 셔틀외교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저자세 외교라는 비판이 나올 정도로 일본에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로 인해 지지율이 떨어지더라도 감내하겠다고 공언했다. 한일 셔틀외교가 복원되자 한·미·일 공조 또한 보다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한·미·일 정상이 서로 마주보며 환담하는 장면은 '3국 간 공조를 새로운 수준으로 발전시키기로 합의했다'는 발표가 외교적 수사에 머무르지 않을 것임을 보여줬다. 실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윤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를 한·미·일 3자회담을 위해 미국 워싱턴DC로 초청하겠다고 제안했다. 오는 7월 워싱턴 3자회담이 성사되면, 처음으로 다자회의가 아닌 3국 간 별도 회담을 갖게 된다.


윤 대통령 취임 1년 만에 외교 분야에서 불씨가 먼저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 불씨가 국내 정치는 물론 경제, 사회 분야에서도 옮겨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이를 위해선 윤 대통령의 국민을 향한 진정성 있는 설득이 우선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courage@fnnews.com 전용기 금융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