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 내세우며 '오스만 제국 부활' 외쳐
미디어 및 지역구 장악, 각종 포퓰리즘 정책 쏟아내
이미 20년 집권해 유권자도 변화 두려워
경제난 심각하지만 에르도안 비난 목소리는 작아
튀르키예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지난 21일(현지시간) 지난 2월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튀르키예 하타이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하고 있다.로이터뉴스1
[파이낸셜뉴스] 지난 2003년 총리 취임 이후 약 20년간 정권을 유지해 온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이달 대선에서 온갖 악재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승리하면서, 그의 승리 비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외신들은 튀르키예 유권자가 우파로 기울었다며 민족주의, 이슬람주의,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를 앞세운 에르도안의 선거 전략이 먹혔다고 진단했다. 정작 에르도안 정부의 최대 약점이었던 경제난과 각종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론은 이번 선거에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 부활' 내세워
에르도안은 28일(현지시간) 대선 결선투표 당일 당선 수락 연설에서 오스만제국이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현재 이스탄불)을 함락했던 1453년 5월 29일을 언급했다. 그는 "내일 우리는 다시 한 번 이스탄불을 정복할 것"이라며 "이번 선거는 역사의 전환점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에르도안은 권력을 잡은 이후 지속적으로 이슬람 중심의 투르크 제국 재건을 주장했다. 그는 지난 2012년 만지케르트 전투 1000주년이 되는 2071년에 셀주크나 오스만 제국 수준의 이슬람 국가로 돌아가길 원한다고 밝혔다. 만지케르트 전투는 셀주크투르크 제국이 처음으로 비잔틴 제국에 대승을 거둔 전투다.
그는 투르크 민족주의를 강조하며 강력한 국가를 과시하려 했다.
에르도안은 우선 2016~2018년 미국인 목사 억류 및 러시아 방공 미사일 구입 등으로 미국과 정면 대결했다. 또 2019년에는 튀르키예 분리 독립 세력인 쿠르드족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내전중인 시리아를 침공해 북부 일대를 점령했다. 2022년에는 국호를 영어식 명칭인 터키에서 튀르키예로 바꾸기도 했다. 에르도안은 같은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발생하자 중재자 역할을 자처해 국제적인 영향력을 뽐냈다.
또 그는 수니파 이슬람 국가 건설을 외치며 이슬람 학교를 증설했다. 2020년에는 세계 문화유산인 성소피아대성당을 이슬람 사원으로 바꾸었다. 동시에 공공장소에서 여성들의 히잡 착용을 인정하고 세속주의를 표방하던 터키 공화국의 이념에 역행했다. 그는 세속주의를 대표하는 군부가 2016년에 일으킨 쿠데타를 진압하면서 권력을 다졌다.
독일 이슬람 매체 칸타라는 이달 보도에서 튀르키예 유권자들이 시리아 내전 이후 쿠르드족 분리운동과 난민 유입으로 인해 우파로 기울었다고 진단했다. 이어 에르도안의 민족주의·이슬람주의적인 우파 정책들이 계속 인기를 얻을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앙카라 시민이자 에르도안 지지자인 무스타파 외즈튀르크는 AP통신과 인터뷰에서 심각한 경제난과 물가상승에 대해 묻자 다른 나라들도 코로나19 이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경제 문제가 "에르도안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에르도안이 이슬람을 사회 전면으로 가져와준 것에 부채의식을 느끼고 있다"며 절대로 에르도안에 반대하는 투표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빈틈없는 통제와 포퓰리즘
에르도안 역시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여당인 정의개발당(AKP)의 당원이 1100만명에 달한다며 지방 곳곳에 풀뿌리 조직이 잘 갖춰져 있어 유권자 관리가 쉽다고 지적했다. 반면 야당 대표인 공화인민당(CHP)의 당원은 140만명에 불과했다.
미디어 역시 에르도안의 손아귀에 있었다. TRT 방송 등 국영 매체들은 노골적으로 친정부 방송을 내보냈다.
AP통신에 따르면 TRT가 4월 1일 이후 5월까지 에르도안에 관해 방송한 시간은 최소 48시간이지만 CHP 대선 후보로 나선 케말 클르츠다로을루에 대한 보도는 32분에 그쳤다. 에르도안은 클루츠다로을루가 쿠르드족 진영의 지지를 받았다면서 그를 테러리즘 옹호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전문가들은 이미 에르도안이 20년이나 집권한 탓에 에르도안의 정책을 되돌린다는 야권의 제안이 오히려 대중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했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여러 차례 개헌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는 에르도안은 선거철에 맞춰 선심성 정책을 쏟아냈다. 그는 경제난으로 물가가 치솟고 터키 리라 가치가 급락하는 상황에서도 서민 경제를 살려야 한다며 기준 금리를 계속 내렸다. 그 결과 튀르키예의 물가상승률은 지난해 10월 기준 85%에 달했다. 물가상승률은 지난 4월 기준 43.7%로 내려갔지만 여전히 중앙은행 목표치(5%)를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같은달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튀르키예의 경제성장률이 2.7%라고 예상했으며 이는 지난해(5.6%)의 절반 수준이다.
에르도안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지난해 12월에 퇴직 연금을 받는 정년 제한을 폐지한다며 225만명이 즉시 은퇴하여 연금을 받을 수 있다고 선언했다. 에르도안은 이달 대선 직전에 공공 근로자의 최저임금을 45% 올린다고 발표했다. 이외에도 무상 인터넷 등 포퓰리즘 정책이 줄을 이었다. 그는 대선 결선투표 당일에도 투표소에서 지지자들에게 돈을 나눠주어 구설수에 올랐지만 연장자가 아이들에게 돈을 주는 전통이라고 항변했다.
에르도안은 지난 2월 대지진으로 4만1000명 이상 사망한 상황에서도 연내 32만 가구의 주택을 공급하는 등 대규모 재건 사업을 약속하며 민심을 달랬다. 그는 대선 1차 투표에서 고전이 예상됐던 11개 지진 피해 지역 중 8곳에서 승리했다.
여론조사 전문가 메멧 알리 쿨랏은 "지진 피해자들은 처음에는 여당에 투표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결국 누가 집과 직장을 재건할 것인지 답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들은 이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에르도안임을 알고 있다.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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