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폭력 관련법 여전히 계류중
경찰 초동 대처 미흡했다는 지적도
전문가들 "피해자 먼저 조사하고 가해자와 분리했어야"
14살 연상 동거녀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피의자 30대 남성 A씨가 26일 서울 금천구 금천경찰서로 압송되고 있다. 2023.5.26/뉴스1 ⓒ News1 김성진 기자 /사진=뉴스1
[파이낸셜뉴스] 데이트폭력(교제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정치권은 앞다퉈 관련 법안을 내놨지만 제대로 논의되지도 못한 채 계류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법 개정이 이루어졌더라면 지난 26일 벌어진 '시흥동 교제 보복살인 사건'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법 개정과 함께 이를 현장 경찰의 초동 대응방식도 개선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잠자는 '데이트폭력 관련법'
30일 경찰청에 따르면 데이트폭력으로 검거된 인원은 지난 2018년 1만245명에서 지난해 1만2481명으로 크게 늘었다. 하지만 데이트폭력 가해자에 대해 적극 조치할 법적 근거가 없어 경찰이 초동 대응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앞서 경찰은 지난 26일 발생한 '시흥동 교제 보복살인' 사건을 두고 "데이트 폭력은 접근금지 등의 보호 조치를 할 법적 근거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정치권에선 데이트 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법률안을 발의했지만 유의미한 논의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데이트폭력 방지 법안은 크게 두 종류다. 가정폭력 처벌의 적용 범위를 데이트폭력까지 확대한 '가정폭력처벌법 일부개정안'과, 아예 법안을 새로 만들어 데이트폭력을 별도로 다루는 '데이트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이 그것이다.
21대 국회 들어 발의된 데이트 폭력 관련 법안 4건은 현재 모두 국회 소관위에 회부된 뒤 논의를 멈춘 상태다. 특히 권인숙 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월 발의한 법안에 대한 국회 법사위의 검토 보고서를 보면 '교제 관계의 적용 범위가 불명확하다'는 점을 들어 법 개정을 우려하고 있다. 보고서는 "교제 관계는 법적 관계와 달리 발생 시점을 특정하기 어려워 법 집행 상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봤다.
전문가들은 현행 법 개정을 통해 교제 관계 간 폭력도 두텁게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가정폭력처벌법상 보호 대상을 교제 관계로까지 넓히는 게 바람직하다"면서도 "가정폭력처벌법상 독소조항인 상담조건부 기소유예 제도(가해자가 가정폭력상담소에서 상담받는 것을 전제로 하는 처분), 반의사불벌죄부터 폐지되는 게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울=뉴스1) 유승관 기자 = 데이트폭력으로 경찰 조사를 받은 직후 연인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김모씨가 28일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금천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김씨는 지난 26일 오전 7시17분쯤 서울 금천구 시흥동의 한 상가 지하주차장에서 동거인 A씨(47·여)에게 흉기를 휘둘러 살해한 혐의를 받는다. 특가법상 보복살인은 최소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 최소 징역 5년 이상인 살인죄보다 형이 더 무겁다. 2023.5.28/뉴스1 /사진=뉴스1화상
미흡한 경찰 초동 대응, 화 키웠다
경찰의 미흡한 초동 대처 역시 시흥동 교제 보복살인의 촉발제가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찰은 사건 당일인 지난 26일 새벽 5시 30분께 접수된 폭력 신고를 토대로 가해자 김씨를 임의동행 후 조사를 마치고 6시 11분께 귀가 조치했다. 뒤이어 피해자 A씨를 조사한 뒤 7시 7분께 돌려보냈다. 김씨의 범행은 A씨 귀가 뒤 단 10분 만에 벌어졌다.
이번 사건에서 가해자 조사가 먼저 진행된 것이 일반적인 사례는 아니란 게 전문가 지적이다. 피해자 조사를 먼저 마친 뒤 가해자와 분리될 시간적 여유를 줬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한민경 경찰대 교수는 "피해자·가해자가 너무도 명확했던 사건인 만큼 신고 초기에 이들이 철저히 분리될 수 있는 상황을 경찰이 만들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크다. 가해자를 먼저 조사한 것이 결과적으론 피해자를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을 낳았다"며 "가해자가 피해자의 집 비밀번호를 바꾸고, 폭력을 행사했다는 등의 피해자 진술만 봐도 경찰의 적극적 대처만으로 막을 수 있었던 사건"이라고 분석했다.
일각에서는 경찰이 범죄 위험성 평가에서 '낮음'으로 결론 내린 것이 화를 키웠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범죄 위험성 판단 체크리스트는 피해자가 보복 당할 우려가 있을 경우 가해자·피해자 진술을 토대로 경찰이 작성하는데, 사건을 수사한 서울 금천경찰서는 "피해자 진술로는 폭력이 경미해 위험성이 크지 않다고 판단했다"고 해명했다.
관련해 한 교수는 "통상 범죄 위험성 판단은 입건 뒤 가해자·피해자 진술, 범죄 전력 조회 등 종합적 판단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며 "제도가 도입되더라도 현장 경찰의 적극적 수용·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전했다.
한편 서울 금천경찰서는 다음달 2일 피의자 김씨를 서울남부지검에 송치할 예정이다.
nodelay@fnnews.com 박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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