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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하의 본초여담] 홍국영과 정조비 효의왕후의 갈등은 OOO에서 시작되었다

[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한동하의 본초여담] 홍국영과 정조비 효의왕후의 갈등은 OOO에서 시작되었다
제호탕(醍醐湯)의 원재료인 오매(烏梅), 백단향(白檀香), 사인(砂仁), 초과(草果). 가장 위 오매부터 시계방향. 이것을 가루내서 꿀에 섞어 보관해 두었다가 여름철 물에 타 먹는다.

조선의 22대 왕인 정조의 비(妃)는 효의왕후였다. 효의왕후는 사람들을 대할 때 어질고 너그러우면서 품성이 착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참을성이 있었으며 인내심 또한 강했다.

1762년, 왕실에서는 이산(정조의 이름)과 김시묵의 여식을 세손빈으로 간택한 후 가례를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세손빈은 갑자기 두창(痘瘡)을 앓게 되었다. 두창은 요즘의 천연두다. 당시의 나이는 10세였다. 당시 두창에 걸리면 많이들 죽고 죽지 않더라도 얼굴에 심한 상처를 남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세손빈의 두창은 다행스럽게도 가볍게 와서 한 달여 만에 쾌차가 되었다.

문제는 세손빈에게 어떤 연유에선지 때가 되어도 월사(月事)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후사(後嗣)를 보지 못하니 자못 심각한 문제다. 월사(月事)는 여성의 월경을 말하고, 후사(後嗣)란 대를 잇는 자식이란 의미다. 그러나 이미 가례를 했기에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고, 1776년 음력 4월 27일, 정조가 즉위를 하면서 세손빈은 효의왕후라는 칭호로 왕비가 되었다. 효의왕후는 당시 24세였다.

정조가 왕이 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많은 노론벽파의 중상모략으로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정조의 곁에는 홍국영이란 신하가 있었다. 홍국영은 4년 전부터 정조가 동궁일 때 인연을 맺었다. 이후 정조가 왕이 되는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정적들을 제거함으로써 정조의 신임을 얻었다. 그래서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당시 홍국영의 나이는 단지 29세였다.

홍국영은 머리가 명석했고 야망이 있었다. 그는 곳곳에 심복들을 심어 놓아서 이미 효의왕후가 월사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안 이후부터 자신의 친인척을 통해서 왕손을 이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궁중의 법도 상 음력 5월 5일 단오절에는 약원(藥院)에서 항상 왕과 왕비의 진헌물로 제호탕을 만들어 올려왔다. 제호탕은 매년 단오절에 왕과 왕비, 왕대비에게 봉진(封進)되었고, 왕의 명에 따라서 여러 각신(閣臣)과 기로소(耆老所), 종묘제례를 맡아 하는 신하들에게도 전달했다. 각신(閣臣)은 규장각의 신하들이고 기로소(耆老所)는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다. 따라서 어느 정도 벼슬이 있었다면 제호탕을 받을 수 있었다.

왕에게 제호탕을 하사받았다는 것은 권위와 권력이 있다는 상징이었다. 평장(平章)이나 승상(丞相) 정도의 벼슬 정도가 되면 여름날 길을 나설 때면 왕에게서 하사받은 제호탕을 허리에 차고 다니면서 필요 시에 수시로 복용을 했다. 따라서 만약 당시 제호탕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면 꽤 높은 벼슬임을 알 수 있었다.

제호탕은 더위를 먹어 생긴 열을 풀고 번갈(煩渴)을 멎게 하는 처방으로 오매육, 초과, 사인, 백단향을 가루내서 꿀과 섞은 후에 졸여서 사기그릇에 담아두었다가 찬물에 타서 먹는 처방이다. 일명 궁궐의 여름철 보양음료인 것이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한 해의 단오절에도 제호탕을 만들어 올렸다. 홍국영은 당시 부제조였다. 부제조는 승지가 겸임했기 때문에 동부승지였던 홍국영은 자연스럽게 부제조가 된 것이다. 도제조, 제조, 부제조는 내의원 업무도 관장하고 있었다.

내의원에서는 제호탕을 만들어 올리는 일에 온 정성을 기울이고 신경을 많이 썼다. 예전에도 제호탕에 들어가는 약청(藥淸)에 가짜 꿀을 섞어서 어의가 처벌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 모든 책임은 도제조, 제조, 부제조에게 있었다.

홍국영은 당시 도제조 김양택과 제조 서명선에게 “올해부터 단오절에 제호탕을 봉진하는 일은 제가 도맡아서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김양택과 서명선은 부제조가 실무자이니 당연하다고 여겨 “그렇게 하시게나. 대신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하네.”라고 했다. 겉에서 보기에도 부제조 홍국영이 제호탕 봉진업무를 맡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효의왕후가 거처하는 중전(中殿)의 상궁은 “마마, 항상 단오절이면 내의원에서 제호탕을 만들어 중전에도 전해왔었습니다. 오늘이 단오절이니, 올여름은 제호탕으로 시원하게 넘기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감축드리옵니다.”라고 일렀다.

효의왕후는 첫 제호탕을 기다렸다. 그러나 저녁 수라를 먹을 때가 되어도 제호탕이 오지 않았다. 매년 단오절이면 항상 전달되었다던 제호탕이 오질 않으니 이상했다. 효의왕후는 내의원으로 상궁을 보내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도록 했다.

상궁은 내의원에 도착해서 “왕비마마의 제호탕은 어찌 된 것인가? 매년 중전으로 봉진되던 제호탕이 올해는 감감 무소식이니 말이네.”라고 물었다.

내의원 당직 의원은 명단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효의왕후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중전이 명단에 없는 것이다. 당직의원은 당연히 있어야 할 이름이 빠진 것에 어리둥절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상궁은 중전마마가 명단에 없다고 하면서 그 연유를 확인해서 관련자를 문책해야 할 것이라고 고했다.

그러나 효의왕후는 “아니네,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네. 자네는 일을 크게 만들지 말게나.”라고 일렀다.

중전은 누군가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지만 참았다. 효의왕후는 그 해 여름을 무척 덥게 지냈다.

다음 해, 1778년 정조 2년 음력 5월 2일. 정조의 왕대비인 정순황후는 “불행하게도 중전에게 병이 있어서 후사를 볼 가망이 없게 되었다.”고 하면서 후궁을 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홍국영은 이때다 싶어 자신의 여동생 홍빈(洪嬪)을 후궁으로 입궁시킬 궁리를 했다. 궁에는 비밀이란게 없었기에 홍국영이 자신의 누이를 후궁으로 들이고자 한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효의왕후는 후궁을 들인다는 사실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상심이 컸고 그 비참함은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어쩌랴. 자신의 문제 때문에 후궁을 들인다니 말이다. 분하고 원통해서 잠을 이루지 못한 날들이 이어졌지만, 그녀는 결코 속 마음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며칠 후 음력 5월 5일, 단오절이 되자 작년과 마찬가지로 내의원을 통해서 궁궐의 곳곳에 제호탕이 봉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올해도 여전히 효의왕후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

음력 6월 13일, 홍빈은 13세의 나이에 후궁으로 책봉이 되었다. 후궁에 대한 예후는 도를 넘었고 모든 격식에 있어서 파격 그 자체였다. 심지어 왕비가 건재함에도 불구하고 후궁의 이름에 으뜸원(元) 자를 써서 빈호를 원빈(元嬪)으로 칭했다.

때는 한여름으로 날은 무척이나 더웠다. 곁으로는 차분한 척했지만, 심화(心火)가 들끓었다. 상궁이 어디서 구해 왔는지 제호탕을 시원한 냉수에 타서 올렸지만, 효의왕후는 마시지 않았다. 원빈은 후궁으로 책봉된 후 효의왕후에게 인사를 올리기를 청했다. 그러나 효의왕후는 더위를 핑계로 며칠 동안이나 거절했다.

다음 해, 1779년 정조 3년 음력 5월 5일, 효의왕후는 그해 단오절에도 제호탕을 받지 못했다.

효의왕후는 상궁에게 “올해는 제호탕 맛을 볼 수 있을 줄 알았건만. 나의 심장은 지금 물 밖으로 뛰쳐나온 물고기가 팔딱거리듯이 두근거려 마음을 진정하기 어렵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한숨을 쉬면서 자신의 손바닥을 벌렁거리는 가슴에 대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자신의 속마음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던 중전이 이런 말을 하다니, 상궁은 깜짝 놀랐다.

그런데 이틀 후 음력 5월 7일, 가례를 올린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원빈 홍씨가 급사했다. 원빈 홍씨가 어떤 연유로 급사했는지 아는 이가 없었다. 병사(病死)라는 말들도 떠돌았지만, 14세의 나이에 병사는 이해할 수 없었다. 홍국영은 이를 효의왕후의 소행으로 의심하고 중전의 나인들을 혹독하게 문초를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중전의 소행이라고 고하는 이들이 없었고, 아주 하찮은 증거조차도 없었기 때문에 원빈의 죽음은 미궁에 빠졌다.

홍국영은 여전히 중전이 저지른 일로 굳게 믿었다. 그래서 이듬해 효의왕후를 독살하기 위해서 독약을 탄 음식을 왕비전에 넣었다가 발각되어 역명(逆名)을 입게 되었다. 홍국영은 결국 축출당해 향리로 내려와 칩거하다가 33세의 젊은 나이에 병을 얻어 사망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많은 신하들이 홍국영의 여죄를 다시 묻기 시작했다. 특히 정조 즉위년부터 단오절에 효의왕후에게 절기 진헌물인 제호탕을 올리지 않고 중전을 핍박한 사실까지 드러나자, 신하들은 ‘홍국영은 잔악할 뿐만 아니라 옹졸하기까지 했구나.’라고 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제호탕이 뭐길래! 만약 홍국영이 단오절에 효의왕후에게 제호탕을 올렸다면 그날들의 역사는 바뀌었을까?

* 제목의 ○○○은 제호탕(醍醐湯)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 조선왕조실록> 正祖 7年 癸卯. 1783年 1月 15日. 逆賊國榮, 以不奪不厭之心, 逞至妖至憯之計. 중략. 逆謀至及於坤闈, 爲臣子忍發此說? (정조 7년 계묘년, 1783년 음력 1월 15일. 역적 홍국영이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지극히 요망하고 지극히 무자비한 꾀를 부렸다. 중략. 중전까지 죽이려고 역모하였으니 신하로서 어찌 차마 이 말을 끄집어낼 수 있겠는가?)
正祖 21年 丁巳. 1797年 5月 3日. 內醫院提調沈煥之啓言: “每年端午, 封進醍醐湯于各殿宮, 而中宮殿無封進之例, 取考謄錄, 先朝乙未以前封進, 而丙申以後闕封. 請自今年, 依舊例封進.” 允之. (정조 21년 정사년, 1797년 음력 5월 3일. 내의원 제조 심환지가 아뢰기를, “매년 단오에 각 전궁에 제호탕을 봉진하는데, 중궁전에는 봉진한 사례가 없기에 등록을 가져다 상고하니 선조 을미년 1775년 이전에는 봉진하였는데, 병신년 1776년 이후로는 빠졌습니다. 금년부터는 구례대로 봉진하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윤허하였다.)
純祖 1年 辛酉. 1801年 5月 22日. 政院啓言: “因備局草記, 丙申年中宮殿進上醍醐湯闕封藥院三提調, 捧現告, 議定其罪事, 允下矣. 其時都提調金陽澤, 提調徐命善, 副提調洪國榮, 自本院考出現告以來, 故捧入矣.” / 5月 25日. 噫! 諸賊之眼無國母, 恣行胸臆, 危逼之逆節,憯毒之凶計, 暗相綢繆, 罔有紀極. 主張者榮賊, 而陽,善焉承望, 指揮者榮賊, 而民始焉和應. 至於丙申節獻之闕封, 己亥宮女之逮訊, 而倫綱之斁敗, 無餘地矣. 處在保護之任, 而端陽之例供, 肆然廢停, 共坐深嚴之地, 而宮人之拷掠, 期於誣服. (순조 1년 신유. 음력 5월 22일. 정원에서 아뢰기를, “비국의 초기로 인하여 병신년, 1776 정조 즉위년. 중궁전에 진상할 제호탕을 궐봉했던 약원의 세 제조는 현고를 받아들여 그 죄를 의정하라는 일을 윤하하셨습니다. 그 당시 도제조는 김양택이었고, 제조는 서명선이었으며, 부제조는 홍국영이었음을 본원에서 상고해 내어 현고해 왔으므로 받아들였습니다.”라고 하였다. / 음력 5월 25일. 아! 여러 역적들이 국모는 안중에 없이 제 마음대로 자행하며 위핍하는 역절과 참혹한 흉계를 암암리에 서로 주무한 바가 한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주장한 자는 역적 홍국영이었는데 김양택과 서명선이 받들었고, 지휘한 자는 홍국영이었는데 정민시가 화응하였습니다. 병신년 절헌의 궐봉과 기해년에 궁녀를 체포해 신문한 데에 이르러서는 윤강이 여지없이 멸절되었습니다. 보호해야 하는 직임에 있으면서 단오의 으레 공상하던 것을 멋대로 폐지하였으며, 심엄한 곳에 함께 앉아서는 궁녀를 고문하여 기어코 무복하게 하였습니다.)
仁祖 26年 戊子, 1648年 6月 16日. 藥房提調趙絅, 啓曰, 日者伏聞, 以醍醐湯雜以假淸劑, 不如法之故, 監劑御醫被勘云, 臣待罪藥房, 已有年矣. 凡監捧藥材及藥淸, 臣之職也. 只於監劑之日, 適以呈告, 副提調臣南銑代行, 則材料之不擇, 藥淸之不精, 无非臣昏謬不察之失, 不勝惶恐悚汗之至, 伏罪待罪. 傳曰, 知道. 勿待罪. (인조 26년 무자, 1648년 6월 16일. 약방 제조 조경이 아뢰기를, “일전에 삼가 들으니, 제호탕에 가짜 꿀을 섞어서 법식대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조제를 감독한 어의가 처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신은 약방의 직임을 맡은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약재와 약청을 감봉하는 일은 모두 신의 직무입니다. 단지 조제를 감독하는 날에 마침 정고하여 부제조 남선이 대행하였으니, 재료를 제대로 선택하지 못하고 약청을 정하게 마련하지 못한 것은 모두 신이 혼미하여 제대로 살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땀이 날 정도로 너무나 황공한 마음을 견딜 수 없어 땅에 엎드려 대죄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대죄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 동의보감> 醍醐湯. 解暑熱, 止煩渴. 烏梅肉(另末) 一斤, 草果 一兩, 縮砂ㆍ白檀香 各五錢, (煉)蜜 五斤. 右細末, 入蜜微沸攪勻, 磁器盛, 冷水調服. (더위를 먹어 생긴 열을 풀고 번갈을 멎게 한다. 따로 가루낸 오매육 1근, 초과 1냥, 사인ㆍ백단향 각 5돈, 졸인 꿀 5근. 이 약들을 곱게 가루내고 꿀을 넣어 약간 끓이면서 고르게 저은 것을 사기그릇에 담아두었다가 찬물에 타서 먹는다.)
< 의방유취> 經驗秘方. 中暑. 醍醐湯. 消食助脾, 解暑止渴, 有益無損. 湖廣平章丞相大人, 每遇三夏, 預備此湯, 名曰醍醐, 隨行將帶, 或用沸湯, 或用冰水, 任意調用. (경험비방. 중서증. 제호탕. 소화시키며 비장을 돕고 더위를 물리치며 갈증을 그치게 한다.
도움만 있지 손해는 없다. 호광의 평장이나 승상대부는 매년 삼복에 이 탕을 미리 준비했으니 이름하여 제호다. 다닐 때 장차 허리에 차고 다니다가, 혹은 끓여서 먹거나 얼음물에 따 먹거나 임의용지한다.)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