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신(항생제)이 널리 쓰이면서 전통 종기치료제 고약(膏藥)은 거의 잊힌 존재가 됐다. 종기는 모낭에서 발생한 염증을 말한다. 위생 관념이 적었던 시절에 종기는 흔한 질병이었다. 심하면 고름이 빠진 자리에 심지를 넣고 고약을 붙였다. 고약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가정마다 비치해 뒀던 상비약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유명했던 두 고약은 '이명래 고약'과 '조고약'이다. 이명래 고약은 1905년에 첫선을 보인 우리나라 '전통의약 1호'다. 1897년에 나온 '활명수'는 국내 최초의 양약(洋藥)으로 분류된다. 이명래 고약을 창안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충남 아산에서 활동하던 드비즈라는 프랑스 신부였다. 이를 천주교 신도였던 이명래(1890~1952)가 전수받았다. 1906년 이명래는 아산에서 개업했다가 1920년 서울로 올라와 중림동 약현성당 근처에서 한약방을 열었다. 이명래는 6·25 전란 중에 뇌일혈로 사망했고 막내딸 이용재 여사(현민 유진오 선생의 부인)가 명래제약을 설립해 현대식 기계로 이명래 고약을 대량생산한 것은 1955년 무렵이었다. 신문에 광고도 냈다(사진·경향신문 1956년 5월 10일자). 그러나 종기 환자가 줄고 양약에 밀려 판매량은 차츰 줄었다. 2002년 명래제약은 부도가 났고 생산도 중단되고 말았다. 천우신약이라는 작은 제약사가 2006년 명래제약을 인수, 현재 이명래 고약 등 다양한 한방약품을 제조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천우신약은 홈페이지에서 천일제약을 모태로 1999년 설립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천일제약에서 이명래 고약을 제조했다고 덧붙였는데 틀린 말이다. 천일제약(천일약방)은 조고약을 제조하고 판매한 제약사다. 이명래 고약은 명래제약과 이명래의 사위가 차린 서울 충정로 한의원에서 제조했다. 1913년 문을 연 천일약방은 한의사로서 의생(醫生) 면허를 받고 외상 환자를 다루는 종의(腫醫)로 활동한 조근창이 설립했다. 조고약 본포(본점)는 서울 예지동에 있었는데 광장시장 바로 옆이다. 조근창의 아들 조인섭은 조고약과 영신환 등의 약품을 만주와 대만으로 수출하는 등 사업을 크게 키웠다. 천일제약은 종전 후에도 서울 종로 4가에 4층 건물을 지을 만큼 건재했다. 이 건물은 나중에 천일백화점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명래 고약과 마찬가지로 조고약의 판매량도 점점 감소했다. 천일제약은 1966년 한상근 대표이사 체제로 전환됐는데 아마도 조인섭 사후 후손들이 가업을 잇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조인섭의 아들 조권중은 1957년 해외 원정경기에 최초로 한국 대표로 출전한 아마 골퍼 강자였다고 한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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