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돌고 돈다'라는 가설이 가끔 진리처럼 맞아떨어질 때가 있다. 조선이 외교권을 빼앗긴 현장인 서울 남산 옛 조선통감부 터에 세워진 조형물에는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History not remembered is repeated)'라는 글이 한·영·일·중 4개 국어로 새겨져 있다. 굴욕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으라는 얘기다.
팔림세스트(Palimpsests)는 깨끗하게 지워서 다시 쓴다는 라틴어이다. 종이가 없던 시절 귀하디귀한 양피지는 반복해서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아무리 깨끗하게 지워도 덧씌움의 흔적은 남기 마련이다. 역사는 양피지 같은 것이다. 흔적을 없애려는 시도도 무모하지만, 흔적을 잊는 무지도 안타깝다.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의 오만방자한 내정간섭 발언의 여진이 잦아들지 않고 있다. 무려 12년 동안 '조선 총독' 행세를 했던 위안스카이의 횡포가 오버랩된다. 두 사람은 한중 관계에 있어서 최악의 이미지메이커가 될지도 모른다.
140년 전 위안스카이는 조선과 청나라를 결딴낸 장본인이다. 병자호란 이후 이어진 종주국과 속국의 연을 끊게 만들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무력진압해 근대화 홀로서기를 틀어막고, 흥선대원군을 납치했다. 청일전쟁의 패배를 자초했다. 이후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침공 이전까지 양국 관계는 단절됐다.
조선은 중화 사대의 상징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운 뒤 일본에 국권을 헌납하다시피 했다. 서울은 차이나타운이 없는 희귀한 대도시가 됐다. 위안스카이가 뿌린 악행의 결과이다. 그는 조선에서 쌓은 경력을 발판으로 중화민국 초대 총통과 중화제국 황제까지 올랐다.
싱하이밍은 어떤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성북동 대사관저로 초대한 자리에서 "미국의 승리에 베팅하는 이들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라는 선거판에 나선 정치인 같은 거친 발언을 내뱉었다. 계산된 언동이다. '위안스카이 따라 하기'라는 시대착오적 영웅심이 의심스럽다. 대사 임기 만료와 외교관 생활 마감을 앞둔 정치적 노림수라는 분석도 있다. 그는 북한 사리원농업대학에서 한국말을 배웠고, 주북한대사관 참사관과 대사대리를 지낸 북한통이다.
유튜브 생중계 자리에 들러리를 선 이 대표의 처신은 두고두고 논란거리다. 중국에 올인한다는 인상을 주기 십상이다. 위안스카이에게 굽신거린 조선 관리의 모습도 연상케 한다. 전·현직 교수단체는 '짜장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던가'라고 쏘아붙였다. 정치적 파장도 만만찮다. 당장 여당은 10만명에 이르는 재한 중국인의 투표권 제한과 건강보험 피부양자 범위 축소를 예고했다. 조선족이 유탄을 맞게 생겼다.
한중 두 나라는 새로운 관계 정립의 전기를 맞고 있다. 21세기 한반도에서 중국이 미국을 대신할 패권이나 영향력을 쥘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안미경중'의 시대도 저물고 있다. '안미경미'로의 흐름을 거스르기 쉽지 않다. 경제보다 안보와 주권을 외치는 목소리가 크기 때문이다.
일찍이 황준헌이 '조선책략'에서 제시한 '친중, 결일, 연미'는 흘러간 노래다. '결미, 친일, 연중'이 대세다. 위안스카이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양국 공히 자중자애할 필요가 있다.
joo@fnnews.com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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