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등 유럽 주요국에서 올해 상반기 파스타 가격 급등
물가상승률의 2배 가까이 올라, 원재료인 밀 가격은 하락세
기업들은 이미 산 비싼 재고와 부대비용 상승 때문이라고 주장
소비자단체 및 정부는 가격 인하 압박, '그리드플레이션' 비난 커져
지난 8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슈퍼마켓에서 고객이 파스타 가격표를 쳐다보고 있다.AP연합뉴스
[파이낸셜뉴스] 한국의 쌀밥처럼 밥상에서 파스타에 의존하는 유럽인들이 최근 파스타 가격 폭등 때문에 분노하고 있다. 소비자단체들은 밀 가격이 떨어지는 마당에 파스타 값은 오른다며 담합 혐의를 제기했으며 기업들이 코로나19나 전쟁 핑계를 대며 과욕을 부린다고 주장했다. 이에 현지 업계는 비싼 밀 재고와 우크라이나 사태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항변했다.
1년 만에 40% 넘게 뛰어
파이낸셜타임스(FT)는 21일(이하 현지시간) 유럽연합(EU) 통계청 자료를 인용해 유럽 각지에서 스파게티, 푸실리 등을 포함한 파스타 가격이 유달리 가파르게 올랐다고 지적했다.
지난 4월 기준으로 헝가리의 파스타 가격은 전년 대비 46.7% 올랐다. 국민 1명당 해마다 23kg의 파스타를 소비하며 매일 국민의 약 60%가 파스타를 먹는 이탈리아의 경우 같은 기간 파스타 가격이 15.7% 올랐다. 영국과 독일, 프랑스의 파스타 가격도 1년 전보다 각각 27.6%, 21.8%, 21.4% 상승했다.
FT는 파스타 가격 상승속도가 평균 물가상승률을 앞선다고 설명했다. 헝가리의 지난 4월 물가상승률은 전년 대비 24%에 불과했다. 같은 기간 이탈리아의 물가승률도 8.7%였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파스타를 소비하는 이탈리아에서는 3월과 5월에도 파스타 가격이 각각 전년 대비 17.5%, 14%씩 계속 올랐다. 영국 투자사 쇼어캐피털의 클라이브 블랙 애널리스트는 가격 급등이 "이탈리아 가정에 꽤나 실존적인 위기"라고 설명했다.
반면 이탈리아 파스타의 주원료인 캐나다산 듀럼 밀의 가격은 내려가고 있다. 이탈리아 최대 농업 단체 콜디레티에 따르면 듀럼 밀 값은 지난해 5월 이후 30% 떨어졌다. 캐나다에서는 지난 2021년 극심한 가뭄으로 밀 가격이 폭등했지만 지난해 12월부터 꾸준히 시세가 내려가는 추세다. 현재 시세는 가격 폭등이 시작되기 전인 2021년 6월 보다 18.8% 높은 수준이며 고점 대비로는 약 40% 낮다.
아울러 미국 미시건 주립대의 데이비드 오르테가 식품 경제학 부교수는 지난달 미 공영 NPR방송을 통해 미국에서도 지난 4월 기준으로 파스타의 일종인 마카로니 및 스파게티 가격이 전년 보다 약 20% 올랐다고 지적했다. 같은 기간 미국의 식품 물가상승률은 7.7%였다.
<지난 4월 기준 유럽 주요국의 파스타 가격 상승률> *전년 동기 대비 *단위: % *자료: 파이낸셜타임스(FT)
비싼 재고에 부대비용 생각해야
파스타 제조사들은 원재료 가격이 내려간다고 해서 제품 가격을 바로 내릴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탈리아의 대형 파스타 생산업체인 라몰리사나의 주세페 페로 최고경영자(CEO)는 "기업들이 최고가에 구매한 밀 재고를 소진 중이기 때문에 가격을 내릴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앞으로 3~4개월에 걸쳐 해당 재고가 소진되면 가격은 내려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업계 단체인 이탈리아식품파스타연합의 루이지 크리스티아노 로렌자 사무총장은 기업들이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여전히 비싼 에너지, 물류, 포장비용을 부담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밀 가격 하락이 제품에 영향을 끼치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설명했다.
그는 "생산 비용이 제품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며 "지금 추세가 당분간 이어진다면 소비자 가격 하락도 볼 수 있다"고 예상했다.
오르테가 역시 "식품 가격은 특정한 충격이 발생하면 매우 빠르게 오르지만 다시 내리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지적했다. 이어 "밀 같은 원자재 가격이 꽤 내리긴 했지만 여전히 임금은 오르고 있고 포장이나 기타 작업에 필요한 원자재 가격 또한 높은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소비자 단체 코다콘스는 "현실은 제조사들의 이야기와 한참 다르다"며 "연간 파스타 가격 상승률이 현재 물가상승률의 2배 수준"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정부를 상대로 제조사들의 가격 조작을 조사하라고 촉구했다. 또 다른 소비자 단체인 이탈리아 소비자권익보호협회는 26일부터 1주일 동안 기업들의 파스타를 구매하지 말고 집에서 만들어 먹자는 불매 운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이탈리아 파라 산 마르티노에 위치한 파스타 제조사 드 세코의 공장.로이터뉴스1
'그리드플레이션' 논란
FT는 제조사들이 코로나19나 우크라이나 사태를 내세우면서 '탐욕인플레이션(Greedflation·그리드플레이션)'을 일으킨다는 비난에 직면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11일 스위스 UBS은행의 폴 도너번 수석 글로벌 이코노미스트는 해당 신조어에 대해 기업들이 광범위한 가격 상승세를 이용해 필요 이상으로 가격을 올리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미 소비자단체 어카운터블US는 지난 14일 보고서에서 식품 기업 및 소비재 기업들이 최소 마진율을 보호하기 위해 가격을 계속 인상한다고 주장했다. 미 연방준비제도(연준) 통계에 따르면 미 기업들 평균 세후 이익률은 2020년 1·4분기에 10% 수준이었으나 2022년 2·4분기에 16%까지 증가했다. 지난달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프록터앤드갬블(P&G), 유니레버, 네슬레 등 소비재 기업들이 1·4분기 매출 감소에도 불구하고 분기 말인 4월에 제품 가격을 10% 가까이 올렸다고 지적했다.
각국 정부들은 생필품 가격이 치솟자 서둘러 대책 마련에 나섰다. 지난달 이탈리아 정부는 생산업체와 유통업체 등을 모아 긴급회의를 열어 파스타 가격을 논의했다. 당국은 일단 에너지 및 원자재 가격이 내려가면 파스타 가격도 적정 수준으로 내려간다고 보고 시장 개입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프랑스 재무부는 식품 생산업체들이 가격을 낮추지 않으면 세금 부과 등 금융 제재로 수익을 환수하겠다고 경고했다. 영국 정부는 시장 개입을 논의 중이지만 우선 유통사가 임의로 식료품 가격을 올리지 않도록 권장하는 상황이다.
여론이 나빠지자 이탈리아의 드 세코와 바릴라, 프랑스의 판자니 등 파스타 생산업체들은 7월 1일부터 가격을 내리겠다고 예고했다.
FT는 당장 시장에서는 가격 인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한편 한국의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8일 발표에서 밀 가격 상승에 따른 라면 가격 인상을 언급했다. 그는 “지난해 9~10월에 많이 인상했는데 현재 국제 밀 가격이 그때보다 50% 안팎 내렸다”며 “기업들이 밀 가격 내린 부분에 맞춰 적정하게 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