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한국여해재단 박종평 이순신학교 교수
이순신은 인류 역사상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위대한 군인이다. 이순신의 후원자였던 류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그는 부하 장수들과 군사들에게 ‘군신(軍神)’으로 추앙되었다.
‘이순신 장검’에 대한 최초 문헌, 『이충무공가승』
최근 문화재청에서는 이순신의 장검(長劍)을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이와 관련해 정부 기관인 문화재청 발표문에 언급되지 않은 몇 가지 정보를 전하고자 한다.
문화재청의 보도자료, <충무공 이순신의 애국 의지 담긴 「이순신 장도」 국보 지정 예고>(2023.06.22.)에 따르면 국보 승격 추진 근거로 “『이충무공전서』의 기록과 일치하는 칼날에 새겨진 시구를 통해 충무공 이순신의 역사성을 상징하는 유물로 가치가 탁월”, “칼자루 속 슴베에 1594년 태귀련, 이무생이 제작했다는 명문이 남아 있어 제작연대와 제작자가 분명하다”, “조선 도검의 전통 제작기법에 일본의 제작기법이 유입되어 적용된 양상을 밝힐 수 있다”는 등의 이유를 제시했다.
또 “장도 1의 칼날 위쪽 부분에는 이순신이 직접 지은 시구 ‘삼척서천산하동색(三尺誓天山河動色,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이, 장도 2의 칼날 위쪽 부분에는 ‘일휘소탕혈염산하(一揮掃蕩血染山河,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이충무공전서』의 기록과 일치한다”고 했다.
『이충무공가승』(1715, 고려대)
『이충무공전서』(1795, 미국 버클리대)
발표문이 근거를 둔 『이충무공전서』는 정조대왕의 명령으로 1795년에 간행되었다. 그러나 장검의 존재는 1709년에 이순신의 집안에서 편집해 1715년에 전라좌수영에서 간행한 『이충무공가승』(이순신 4대손 이홍의 편집, 5대손 이봉상이 간행)에 먼저 등장했다.
즉 이순신의 후손들이 장검을 소유하고 그것에 기초해 자신들이 편집 및 간행한 『이충무공가승』에 문헌으로 남겼고, 그것이 다시 정조가 편찬하게 한 『이충무공전서』에 실렸다. 집안에서 1715년에 만든 『이충무공가승』와 국가에서 1795년에 만든 『이충무공전서』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시기적으로는 분명 선후의 관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1715년 『이충무공가승』이 최초 문헌 근거 자료가 되어야 한다.
이순신의 장검에 새겨진 류성룡의 글
류성룡, 『서애집』, 「정충록 발(跋)」(1585), 국사편찬위원회
이순신의 일기 1593년 9월 15일 이후 메모. 문화재청
또한 장검 설명 중 장검 1의 경우, “이순신이 직접 지은 시구 ‘삼척서천 산하동색(三尺誓天 山河動色,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라고 했는데, 이는 아주 애매하다. 이 글은 이순신의 1593년 9월 15일 일기 뒤에 기록된 시구 메모, “척검서천 산하동색(尺劍誓天 山河動色)”을 변형한 것이다. 장검의 ‘삼척(三尺)’과 일기 메모의 ‘척검(尺劍)’만 다를 뿐이다.
그런데 이순신의 이 메모는 중국 송나라 명장 악비(岳飛, 1103~1141)의 전기로 선조의 명령으로 1585년에 간행된 『정충록』이란 책에 류성룡이 발문(跋文)으로 쓴 글의 일부이다.
이순신이 류성룡의 글을 읽고 일기에 메모했다가 장검을 만들면서 두 글자를 바꾼 것이 장검 1의 시구이다. 따라서 장검 1의 시구는 이순신이 직접 지었다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이 부분은 류성룡의 글을 응용했다고 해야 할 듯하다.
또한 문화재청에서는 이 칼들을 ‘장도(長刀)’라고 했으나, 조선시대부터 이 칼은 ‘장도’가 아니라 ‘장검’으로 써 왔다. 칼의 형태를 기준으로 ‘장도’라고 할 수 있으나, ‘장검’이라는 오랜 관행이 타당할 듯하다. 후세의 기준으로 임의로 이름을 바꾸는 것은 적절치 않을 듯하다.
일본도의 영향을 받은 이순신의 장검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 장검은 “일본의 제작기법이 유입되어 적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일본도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칼자루 속 슴베에는 ‘갑오사월일 조 태귀련 이무생 작(甲午四月日 造 太貴連 李茂生 作, 갑오년 4월, 태귀련·이무생 제작)’라는 글귀가 있다. 일본도의 영향은 칼의 생김새 등으로도 알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이순신의 기록과 선조실록을 통해서도 일본의 칼 제작 방식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다음은 관련된 이순신의 일기이다.
◉ 1595년 7월 14일. 이상록과 태구련(太九連), 공태원(孔太元) 등이 들어왔다.
◉ 1595년 7월 21일. 태구련(太九連)과 언복이 만든 환도(環刀)를 충청 수사(선거이)와 두 조방장(助防將. 박종남.신호)에게 각각 한 자루를 나누어 보냈다.
◉ 1594년 5월 4일. 저녁에 공태원에게 물었더니, “왜(倭) 등이 바람을 따라 배를 띄워 본토(本土, 일본)로 향했다가 바다 가운데서 강한 회오리 바람으로 배를 제어할 수가 없어 이 섬에 표류해 도착했다.”고 했다. 그러나 교활하게 속이는 말이라 믿을 수 없었다.
이 세 일기를 보면, 태구련, 공태원이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일기 속 태구련이 바로 장검에 새겨진 태귀련으로 볼 수 있다. 장검에 일본식 칼 제조법이 활용된 것은 태귀련 때문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태귀련과 함께 언급되는 공태원 때문이다. 공태원은 『선조실록』(선조 33년(1600년) 1월 28일)에 따르면 일본에 포로로 붙잡혀 갔다가 1590년에 일본에서 송환된 사람이다. 또 이순신의 장계인 「왜적을 무찌른 일을 임금님께 보고하는 장계(討賊狀)」(1593년 4월 6일」에서는 “정해년(1587년)에 왜구에게 잡혀갔다가 돌아온 사람으로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이순신 막하에서 진무(鎭撫)로 있었다.
포로가 되어 돌아온 공태원과 태구련이 같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태구련 역시 일본과는 관계가 있는 인물로 추정된다. 일본에 다녀와 일본말을 하는 공태원, 그와 같이 이순신을 찾아온 태구련. 그리고 현존하는 칼의 모습은 이순신의 장검이 일본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장검의 국보 승격과 새로이 번역된 『이충무공전서』
장검을 국보로 승격하게 하도록 결정적 영향을 미친 문헌은 앞서 언급했듯 『이충무공전서』이다. 그런데 장검이 국보로 승격할 것이라는 문화재청의 발표 직전에, 『이충무공전서』 한글 번역본이 간행되었다. 『신정역주(新訂譯註) 이충무공전서』(태학사, 2023.06)이다. 이 번역본은 1795년, 정조의 명령으로 국가기관인 규장각에서 한문으로 간행한 이래 약 230년 만에 처음으로 우리말로 제대로 번역된 것이다.
‘제대로’라고 한 이유는 『이충무공전서』의 국한문 혹은 한글 번역의 역사 때문이다. 국한문으로는 일본인 아오나기 쓰나타로(靑柳綱太郞)가 1917년에 『이순신전집(李舜臣全集) 전(全)』으로 일부 발췌해 간행했다. 한글이 부분적으로 처음 사용되었다. 그 뒤 한글 번역은 1955년 북한에서 홍기문의 주도로 『리순신장군전집』이란 이름으로 발췌되어 간행되었다.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1960년에 이은상 주도로 번역한 『국역주해(國譯註解) 이충무공전서』가 처음이었고 1989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일본인이 처음 시도한 뒤, 북한에서, 또 이은상에 의해 번역되었으나, 이번 『신정역주(新訂譯註) 이충무공전서』는 그야말로 21세기 우리나라의 국격에 맞는 번역서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일제의 잔재가 없는 번역서이다. 둘째, 번역자들 모두 해방 이후 세대로 일제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다. 셋째, 역사학과 한문학 전공자들로 당대 최고의 전문가들이다. 넷째, 정조 때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오류까지 검증했다. 다섯째, 이 번역서는 국가가 아닌 민간이 주도했다. 즉 정조 때는 왕권 수호를 위한 목적이 있었고, 일본인 간행판은 일본의 침략 목적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북한판은 북한 정권 정당화를 위한 배경이 있었다.
또 이은상판 역시 당시 자유당 정부의 지원을 받은 것이었다. 반면에 이번 번역서는 오로지 민간의 자발적 의지로 만들어진 것이다.
장검이 국보로 승격되는 시점에 새로이 번역되어 출간된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가 우리 국민에게 자부심을 주고, 우리 문화가 세계 곳곳에서 꽃을 피울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정리=
haeneni@fnnews.com 정인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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