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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최대 미스터리 '왜 북한군은 3일간 서울에 머물렀나'[밀리터리 월드]

한반도서 미·중 대규모 출혈 유발... 약화하려는 스탈린의 사주 드러나

[파이낸셜뉴스]
6·25 최대 미스터리 '왜 북한군은 3일간 서울에 머물렀나'[밀리터리 월드]
서울에 진입한 소련제 T-34 북괴 인민군 탱크 부대, 전차에 맞설 무기가 없었던 국군은 북괴군 전력의 핵심인 소련제 T-34 탱크부대에 힘없이 무너져 전쟁 발발 3일만인 6월 28일 서울을 빼았겼다. 수도 서울의 함락은 한 도시를 잃었다는 것 이상의 엄청난 정치적, 심리적 무게를 갖는 것이었다. 사진=역사박물관 홈페이지 영상 캡처
지난 1994년 6월 2일 김영삼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해 당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연다.

이후 러시아 측은 철저히 감춰져 있었던 6·25 전쟁의 진상을 명확히 규정할 수 있는 구 소비에트연방(소련)의 관련 극비문서 300여점의 사본을 한국에 제공했다.

이 문서의 공개로 북한 김일성과 소련의 스탈린 사이에서 6·25 전쟁이 치밀하게 공모됐고, 당시 중공의 모택동과도 협의됐던 것임이 의심의 여지 없이 입증됐다.

10일 문서 등에 따르면, 1950년 발발한 6·25전쟁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던 ‘북한군 서울 3일 체류‘에 관한 수수께끼도 한 꺼풀 벗겨졌다.

당시 초대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을 이용해 한반도에서 미국과 중공을 끌어들여 소모전을 유발, 양국을 견제·약화함과 동시에 소련이 종주국으로서 유럽에서 공산주의를 확산·강화한다는 전략을 품고 있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남침을 허용, 무기와 장비를 지원하면서 “소련군은 보내 줄 수 없다. 아시아 문제는 군대의 동원은 중국 공산당에게 요청하라”며 작전통인 2차 세계대전의 영웅 바실리예프 장군을 북한에 보내 남침작전 계획의 작성을 주도한다.

전차부대를 앞세운 북괴군은 남침을 개시한 지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 한강 이북을 점령하지만 돌연 국군에 대한 추격을 멈춘다. 김일성은 당일 서울 시청 앞에서 전차부대 등을 집결, 서울 점령식을 열면서 위용을 과시한다.

결국 북한군의 서울 3일 체류 미스터리는 소련의 계획에 따라 미군이 참전할 시간을 벌기 위한 스탈린의 사주가 한몫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당시 스탈린과 김일성 간 오간 극비 문서엔 관련 내용이 없지만 7월 1일 스탈린은 북한 주재 대사 테렌티 스티코프에겐 “남한을 빨리 ‘해방’시킬수록 미국의 참전 가능성이 작아진다"며 주고받은 전문이 드러났다.

후임 소련의 북한 주재 군사고문단장인 블라지미르 라주바예프도 특명전권대사와 소련 무관 등 3개 직책을 동시에 갖고, 그가 지휘하는 246명의 소련군사고문단은 한국전쟁의 전 과정을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이러한 행태는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급작스런 뇌출혈로 알려진 사망시까지 계속된다.

유엔군 참전의 단초가 된 소련 유엔대표 대사 만리크의 안전보장이사회 불참 사유도 스탈린의 지시에 의한 것이란 새로운 분석이 나왔다.

당시 북괴군이 3일간 서울에 머물지 않고 기세를 몰아 전차부대를 동원해 한강 이남으로 부산까지 밀어붙였다면 미국 지상군과 연합군 참전도, 인천상륙작전도 없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6·25 최대 미스터리 '왜 북한군은 3일간 서울에 머물렀나'[밀리터리 월드]
서울에 진입한 소련제 T-34 북괴 인민군 탱크 부대, 전차에 맞설 무기가 없었던 국군은 북괴군 전력의 핵심인 소련제 T-34 탱크부대에 힘없이 무너져 전쟁 발발 3일만인 6월 28일 서울을 빼았겼다. 수도 서울의 함락은 한 도시를 잃었다는 것 이상의 엄청난 정치적, 심리적 무게를 갖는 것이었다. 사진=미 국립문서보관소

wangjylee@fnnews.com 이종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