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철학자 요한 고트리이프 피히테(1762~1814)는 나폴레옹 치하에서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연속 강연을 통해 패전 조국이 살길은 교육뿐임을 설파했다. 베를린대학 초대 총장을 지낸 대학자의 장장 14주에 걸친 일요일 오후 강연이 현대 독일정신의 기틀이 됐다.
방탄국회와 정쟁을 일삼는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에게 피히테식 정신교육이 절실하다. 국회의원은 모두 186가지의 특권을 누리고, 1억5500만원이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세비를 받는다. 선거 때면 특권 폐지를 내세우지만 당선 후 입을 닦는다. 스스로 특권을 폐지할 걸 기대하느니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게 낫다.
국회는 제75주년 제헌절인 지난 17일 국회 출입기자와 헌법 관련 3개 학회를 대상으로 개헌관련 설문조사를 했다. 전공교수와 출입기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 10명 중 9명이 개헌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압도적 수치의 개헌 요구이다. 개헌 주체인 국회의원들만 눈 감고, 귀 막고, 입 다물고 있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대통령 4년 중임제, 국무총리 복수 추천제, 국회의원 불체포 특권 폐지가 포함된 개헌을 하자고 제안했다. 국민이 직접 개헌을 주도하는 국민 공론제 도입도 포함됐다. 시도는 가상하나 실현 가능성을 믿을 국민은 드물다. 게다가 입법기관의 수장이 국민 직접 개헌 추진 운운하는 것도 어색하다.
국회의원들은 개헌이 아니라 자신들에 대한 불체포 특권 폐지 결의조차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론의 뭇매를 맞은 국민의힘 소속 의원 112명 중 110명이 불체포특권 포기 서약에 마지못해 서명했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정당한 영장 청구에 대해'서만 불체포특권을 포기하겠다고 버텼다. 당 혁신위원회가 내놓은 1호 혁신안에 '요상한' 단서를 달아 거부한 셈이다. 서약도, 당론 채택도 없는 우스꽝스러운 결론이다.
중도 제 머리는 깎지 못하는 법이다. 체포동의안 처리를 국회의원 개인의 양심에 맡기는 게 무슨 실효성이 있겠나. 국민의 기대를 저버린 국회의원들에게 행동으로 보여줘야 할 때가 왔다. 장기표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 상임 공동대표는 "정치 수준은 국민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국회의원들이 아닌 국민이 정치를 바꿔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옮은 말씀이다.
우리는 2000년 제16대 총선 당시 낙천·낙선 운동의 위력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총선시민연대가 찍은 86명의 대상자 중 59명이 쓰디쓴 맛을 봤다. 헌법재판소가 낙천·낙선운동을 금지하는 현행법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리는 바람에 막을 내린 게 두고두고 아쉬울 뿐이다. 세상이 달라졌으니 헌재의 결정을 다시 받아보는 것도 방법이다. 앞으로 특권포기 서약을 하지 않는 출마자에 대해선 조직적 낙선운동을 펼칠 계획이라고 하니 기대해봄 직하다.
나라를 판 대가로 온갖 특권과 영화를 누린 만고역적 이완용이 세상을 떴을 때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나…누가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냐?'라는 부음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제 손으로 만든 특권 지키기에만 열중하는 국회의원들은 국민의 거센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국회의원들에게 엄중하게 경고한다. '무슨 낯으로 금배지를 달고 다니나. 국민이 준 권한을 팔아서 누린 걸 토해내라'.
joo@fnnews.com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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